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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 Apr 27. 2024

네르하, 옥상을 기억하며

디지털 노마드 in 스페인


버스나 비행기를 타고 새 여행지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하는 일은 항상 똑같다. 바로 숙소를 찾아가 짐을 푸는 것.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이 나를 손짓한다 하더라도 일단 발걸음은 숙소로 직진이다. 그러고 보면 도시보다 더 먼저 만들어지는 첫인상이 바로 숙소일 것이다.



네르하 숙소는 작은 옥상 테라스가 딸린 복층 집이었다. 에어비앤비 앱에서 미리 본 숙소는 좋게 말하면 푸근하고 요즘 기준으로 말하면 촌스러운 곳이었다. 바닥에는 찐갈색 타일들이 투박하게 깔려 있었고 90년대풍 원목 가구들과 옛스러운 장식품들이 집안 곳곳에 놓여 있었다. 침실이 있는 2층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자다가 화장실을 가려면 긴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너무 늦게 숙소를 찾는 바람에 다른 대안들이 없어서 결국 이 집을 선택했지만 도착하기 전까지 내내 마음에 걸렸다. 수업을 하느라 오전 나절 내내 집에 있어야 하기에 숙소의 컨디션에 신경이 많이 쓰이곤 했다. 숙소에 따라 ‘기분 좋은 여행’과 ‘기분 좋아지려고 애쓰는 여행’이 갈라지곤 했으니까.


네르하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호스트에게 문자를 남겼다. 지금 집에 있으니 걱정말고 오라는 호스트의 답을 받고 우리는 돌돌돌 캐리어를 끌고 갔다. 문앞에 도착해 벨을 누르니 환한 미소로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를 반겨주셨다. 서로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아주머니는 23인치 캐리어를 번쩍 드셨다. 무겁다고 말릴 새도 없이 아주머니는 2층으로 곧장 올라가시고는 우리를 부르셨다. 남편과 나는 얼른 따라 올라갔다.



졸래졸래 아주머니 뒤를 따라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는“와!” 소리를 질렀다. 탁 트인 층고와 널찍한 거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사진에서는 장식품들이 촌스럽게만 보였는데 직접 보니 아주머니가 일일이 정성스럽게 고른 물건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식탁 위에는 바구니에 신선한 과일들이 종류별로 담겨 있었고 냉장고에는 시원한 맥주와 음료수들이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뜻하고 아늑한 가정집에 초대받은 느낌이었다. 에어비앤비 사진을 내가 다시 찍어드릴까,순간 고민이 들 정도였다.



거실과 화장실 설명을 마치신 아주머니께서 위층으로 우리를 안내하셨다. 위층에는 아늑한 아늑한 침실이 있었고 그 옆 문을 여니 옥상 테라스가 나왔다. 파란 하늘 너머 멀리 수평선이 보였다. 아주머니께서는 파라솔을 펴시며 바람과 햇빛이 좋으니 맘껏 누리다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곳 선베드는 그후 일주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차지가 되었다.



아침이면 남편은 동네 빵집에서 갓 나온 바게트를 사왔고 나는 커피를 내렸다. 숙소에 모카포트가 있어 찐한 에스프레소를 내릴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집안에 커피 향기가 진동할수록 행복 농도도 짙어졌다. 옥상 테이블에 상을 차린 후, 막 떠오른 아침 햇살과 쫑알쫑알 새소리와 함께 우리는 아침을 먹었다. 분명 배를 채우고 있는데 마음이 더 꽉 차는 느낌이었다.



든든히 아침을 먹고 수업을 하고 나면 점심때가 되었다. 이제부터는 자유시간. 동네탐방도 하고 주요 관광지들도 보러 가야하는데 이상하게 우리는 미적댔다. 다른 도시에서는 순서대로 동선도 짜고 바쁘게 돌아다니는곤 했는데 이곳 네르하에서만은 마음이 자꾸 옥상으로 향했다.


돌아다니기엔 해가 너무 뜨겁잖아, 옥상 바람이 이렇게 시원한데, 책장에 꽂혀 있던 소설이 재밌겠던데 선베드에 누워 한번 읽어볼까, 그러다 까무룩 잠드는 것도 좋지… 안 나갈 이유는 무한했다.



평소의 나는 발로 밟고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숙소는 해가 뜨면 나가 어둑해지면 돌아오는, 다음 날 여행을 위한 충전 장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곳 네르하에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 이렇게 간단한 거였다면 그동안 왜 나는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이기만 한걸까.


기분 좋은 햇살과 바람, 새소리와 책 한권, 아 그리고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이면 되었다. 나는 이럴 때 행복한 사람이구나. 깨닫게 되니 한국으로 돌아간 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에 대한 방향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다. 짜맞추어진 도시의 시간표를 벗어나 나의 속도, 나의 행복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삶.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네르하 옥상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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