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스페인 여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여행 준비가 드디어 끝났다는 얘기다. 17일의 여행을 위해 한달을 몽땅 쏟아부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장기간 여행을 떠날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는 걸 실감한다. 그래서 더 더욱 이번 여행에 의미를 부여했다. 하루를 열흘같이, 추억도 많이 만들고 잊지 못할 시간들로 채워와야지. 날마다 욕심은 커져만 갔다.
숙소 하나, 교통편 하나를 알아봐도 가성비를 따지고 최선의 동선을 짠다. 열심히 뒤져서 최선의 선택을 해도 마지막 하나가 혹시 더 나을까 싶어 끝없이 인터넷을 뒤졌다. 최고의 여행을 외칠수록 눈꺼풀은 무거워지고 얼굴은 퀭해졌다. 급기야 여행 이틀전부터는 동틀무렵에야 침대로 향하기도.
완벽한 여행을 자부하며 공항에 일찌감치 도착했다. 퇴근시간에 걸려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아예 서둘러 집을 나왔다. 여유있게 도착해서 라운지에서 푹 쉬고 못다한 여행 정보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만하면 괜찮게 시작하는 여행 같아 내 자신이 뿌듯해졌다.
발빠르게 하루 전에 모바일 체크인을 했으니 수하물 위탁만 하면 되었다.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 왠만하면 셀프로 가능하다. 기계로 하는 거라 창구가 열리기 전에도 가능해 일찌감치 짐을 부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다른 항공사들은 하루종일 이용가능하지만 내가 탑승할 네덜란드 항공사만 위탁창구를 미리 열지 않는다. 수속 자체가 불가능해 무조건 대기해야 하는 것이다.
시계를 보니 두시간이 넘게 남아있었다. 에효. 라운지는 수속 이후에 사용 가능하니 라운지에서 먹으려던 저녁 계획은 전면 재수정일수밖에. 무작정 굶을 수도 없어 간단히 분식점을 찾았다. 라운지에서 하려던 프린트와 복사는 공항 구석에 있는 직원 창구에서 해결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여기 저기 돌아다니기 시작. 제 2터미널은 처음 와보는 거라 새롭고 신기했다. 해질 무렵 통유리로 보이는 비행기와 하늘이 참 예뻤다. 그냥 한참을 앉아 바라보았다.
시간이 다 되 씩씩하게 창구로 갔다. 기계에서 시키는대로 착착 수속을 밟고 캐리어를 부쳤다. 안으로 들어가니 라운지 이용시간이 얼마 안남아 두 접시를 한번에 담아왔다. 핸드폰 충전하면서 여유있게 먹어야지 하는 순간 아뿔싸, 보조배터리며 노트북 충전기, 카메라 충전기, 핸드폰 충전기를 몽땅 캐리어에 넣어 부쳐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이륙할때까지 네시간, 암스테르담까지 열한시간, 중간에 두시간 경유하고 포르투까지 또 두시간, 꼬박 하루 가까이 핸드폰을 쓸수 없다는 얘기다. 핸드폰 뿐만이 아니다. 배낭에 무겁게 지고 있는 노트북이랑 카메라는 어쩔건지. 기내에서 보겠다고 받아온 영화들도 몽땅 무용지물. 중간 중간 사진을 찍고 노트북으로 글을 쓰려는 야심찬 계획도 물거품.
멘붕된 마음을 부여잡고 수하물 창구로 갔다. 예상했듯이 가방 회수는 불가능하다는 말뿐이었다. 이제 어쩌지. 계획이 몽땅 틀어졌다.
그런데 그 순간 마음이 훅 시원해졌다. 되돌릴수 없다고 생각하니 포기가 되더라. 이게 자유구나 싶었다. 타이트하게 정해놓은 계획들이 여행을 더 행복하게 만들기보다는 부담스러운 의무였다는게 깨달아졌다. 자유롭고 가벼운 진짜 여행. 십여년전 배낭 하나메고 처음 떠났던 유럽 여행처럼. 온전히 여행과 나에게만 집중했던 그 시간 처럼.
훌훌 털고 공항을 걷다 보니 이런 좋은 카페가 있다. 무료 노트북이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운에 감사하며 주저리 주저리 마음을 적어본다. 덤으로 얻은 행운에 행복하다. 계획은 틀어졌지만 마음은 더 즐겁다. 설레는 여행.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