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공항의 밤풍경)
라운지는 10시에 문을 닫는다. 10시와 함께 공항도 슬슬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얘기다. 제2터미널은 이용 항공사가 4개밖에 안되 워낙에 한산한데 밤이 되니 고요한 느낌까지 난다. 공항 특성상 천정이 높고 사방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충분히 이국적인데 사람들마저 적으니 어느 외국의 밤도시 같다. 여기에 여행을 앞둔 설레임이 더해지니 마음이 한껏 부푼다. 카메라며 배낭이며 짐이 무거운데도 그렇게 발걸음이 가벼울 수 없다. 오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때면 씨익 미소를 건네기도. 내가 이렇게 밝은 사람이었나 싶다.
여행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나는 이미 여행을 살고 있다. 건물, 사람들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했다. 그저 사랑스럽고 행복하다. 돈으로도 살수 없는 이 행복이 어떻게 생기는 걸까 생각하다보니 돈이 필요하긴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여행과 맞바꾼 돈과 시간이 내가 치러야할 경비이니까.
사실 그 중에서도 제일 아쉬운건 시간이다. 결혼 후 수년이 흐른 지금, 당연히 우리는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 아이는 축복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생기면 포기해야할 많은 것들이 미리 아쉽기도 하다. 그 중 첫째는 단연 여행이다. 워낙에 훌쩍 떠나는 걸 좋아하고 혼자 여기 저기 사람 사는 구경을 잘 다니는 나인데 아이가 생기면 모든게 스톱되지 않을까.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울적해진다. 그래서 이번 여행이 더 소중했다. 언제 마지막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기회가 있을 때 마음껏 누리고 주어진 시간에 충실히 반응하자고 다짐했다. 후회 없이, 하지만 과욕은 하지 말고 앞으로의 일정을 보내야지.
고요한 듯, 하지만 저마다의 여행에 대한 설렘이 둥실 둥실 느껴지는 밤 공항을 누비다 보니 어느 새 보딩 시간이 다가왔다. 열시간이 넘는 비행이 살짝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 시간만 지나면 지구 반대편에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났다. 노트북에는 영화도 있고 챙겨간 책도 있고, 여차하면 주저리주저리 일기를 써도 되고, 시간을 보낼 방법은 많다.
미스 리틀 선샤인
감독 조나단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
출연 스티브 카렐, 토니 콜렛, 그렉 키니어, 폴 다노, 아비게일 브레스린, 알란 아킨
개봉 2006 미국
그런데 모든 걸 다 제끼고 기내 스크린에 있는 이 영화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우연히 내용을 접하고 한번 봐야지 했다가 잊어버린 영화였다. 어린이 미인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꼬마와 그 가족들이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떠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가족영화이다. 재단한 듯 획일적인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사람들, 통통하고 평범하지만 가족들로부터 찡한 사랑을 받고 자란 에너지 넘치는 꼬마 주인공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여행을 준비하며 나 또한 많은 고민을 했더랬다. 블로그와 여행 책자에는 수많은 명소들과 레스토랑, 이색 체험등 여행을 소비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넘쳐났다. 일정을 짜며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뺄지 수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 그때마다 내 자신에게 묻곤 했다. 내가 진짜 원하는게 무엇인지.
멋진 사진, 화려한 레스토랑, 한나절 관광 후 다음 도시로 이동하기. 일단 이런 건 내 방식이 아니었다. 미적 감각이 제로인 나는 애시당초 작품 같은 사진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사진의 기준은 내가 느끼는 감정을 따라, 나만의 이야기가 있는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사진 속 장면, 풍경은 그 자리에서 내가 느낀 생각들을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문과 같다. 그거면 충분했다.
음식도 여행 장소도, 관광이 아닌 삶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려면 블로그나 트립어드바이저에서 추천하는 식당들을 과감히 제껴야 했다. 직접 현지에서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동네 사람들에게 친근한 식당들을 찾기로 했다. 소박하지만 정겨운, 친구와 가족과 함께 따뜻한 한끼를 채우는 그런 곳 말이다. 주인과 손님이 격의 없이 서로를 대하고 오가는 눈빛 만으로도 인사가 되는 그런 곳이라면 이방인인 나에게도 미소 한번쯤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화려한 사진이나 근사한 레스토랑이 계획에서 빠졌다. 한 도시에서 최소 이틀 이상은 머물고 싶다는 생각에 갈 수 있는 여행지 수도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살짝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남들 하는 건 다 해봐야하는 거 아닌가. 한 도시라도 더 봐야 나중에 아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거 아닌가.
영화 속 꼬마 아가씨를 보며, 그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그녀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가족들을 보며 다시한번 내 선택을 믿어주기로 한다. 다른 누군가의 기준이 아니라 나에게만 집중하는 여행. 오롯이 내 안의 목소리에만 집중할때 진짜 행복은 시작된다. 내 첫 발걸음을 이 영화가 그렇게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