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때도 난 행복했어
장면#1. 2018년.
영화 <어드리프트: 우리가 함께한 바다>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밤 10시. 집근처 사거리 신호에 멈춰 아내가 묻는다. “여보, 당신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 였어?” 역시 질문이 중요하다. 어떻게 질문하느냐가 사업이던 학문이던 과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우선인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오늘밤, 아니 일주일의 행복이 달렸다.
“음, 어디 보자. 여러 장면이 있지만 그래도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가 가장 행복했지” 아내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피식 웃는다. 생각지도 않았던 답변이었던 것이다. 자고로 유머란 이런 것이다. 뜻밖의 놀라움. 그래도 아내의 입가에선 미소가 가득하다. 속으로 생각한다. 여보, 지금 이순간이 가장 행복해. <이렇게 서로 웃을 수 있는 지금 이순간이>
장면#2. 2000년.
아내와 부등켜 안고 울었다. 기쁨인지 슬픔인지도 몰랐다.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첫째를 임신한지 3개월.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자궁에 혹이 생겼는데 임신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대로 두면 아내도 위험하고 다시는 임신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다음날로 수술을 예약하고 돌아와 울었다.
퉁퉁 부은 아내를 본 옆집 아주머니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다 듣고 난 후, 기적 같은 한 마디를 했다. “다른 병원에 한번 가봐.” 수술예약을 취소하고 간 일산의 자생당 산부인과. “쉽진 않지만 임신 유지하면서 혹 제거 수술 가능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내와 병실에서 부등켜 안고 울었다. <너무 기뻐서 울었다>
장면#3. 2006년.
절망이란 이런 것이구나. 희망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절망이구나. 아주대, 세브란스를 거처 서울대병원. 의사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아드님은 선천성 약시라 얼마 후 영구 실명됩니다.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눈물도 나질 않았다. 출근해서 멍하니 있던 나에게 직원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그가 소개해준 안과를 찾았다. 지푸라기도 잡고 싶었던 것이다. “한번 해.봅시다”
2013년 어느 정기 검진날. 안과 의사에게 물었다. “선생님, 그때 정말 가능했던 거 였어요?” “아뇨. 실명이 확실해 보였어요. 그런데 아빠 엄마의 얼굴을 보는데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더라구요. ㅎㅎㅎ” 옆에서 안경을 끼고 스마트폰으로 게임하는 둘째를 보며 생각한다. <아, 행복하다>
장면#4. 2021년.
아내의 큰 눈이 더 커졌다. “진짜야? 진짜야?” 숫자를 맞춰본 아내가 다시 묻는다. “응. 맞아. 10번도 더 맞춰봤어. 확실해.” 아내가 말한다. “여보, 우선 빚 좀 갚자. 당신 친구들에게 빚 좀 갚고 그리고” 잠깐 호흡을 멈추었다. 다시 말한다. “ 그리고 나 가방 하나 사줘”
ㅎㅎㅎ 그래 그래. 사주고 말고. 로또 1등 당첨됐는데 가방 하나 사 달라고 하는 소박한 아내가 귀엽다. “그래 우선 빚 좀 갚고, 똥으로다가 가장 비싼거 하나 사주께”
빚은 역시 마음의 빚이 가장 무겁다. 나를 견디게 해준 그 마음들. 병선이. 재헌이. 무역과 동기들. 녹색회 전우들. 그리고 여러 지인들. 돈 보다 빌려준 그 마음으로 견딜 수 있었던 지난날을 생각한다. <그래, 그때도 난 행복했어>
<<제일 행복한 때 : 지금 여기. Now &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