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문 Feb 26. 2020

사스의 추억

시간은 진실과 정직의 편이다

<사스의 추억>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보내시겠다면 저를 자르고 하십시오!” 대표이사 실을 나와 버렸다. 2003년 4월, 반도체 장비회사 수출팀장 때였다. 1대에 30억 하는 반도체 장비를 프랑스 국영회사로부터 발주를 받았고 고객 검수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사스가 터진 것이다.


사스(SARS). 급성 호흡기 증후군으로 중국발 코로나 바이러스의 일종. 최초 2003년 2월에 중국에서 발생했으나 중국은 이를 감추었고 결국 3월에 홍콩에서 미국인이 사망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고, 결국 700명 이상 죽었다.


2003년 4월의 어느 날. 프랑스 회사로부터 Dear James로 시작하는 메일이 왔다. 아시아로 여행이 금지되어 예정되어 있던 장비 검수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말미에 이르기를, 장비를 한국에서 자체 검사하고 이상이 없다고 하면 선적해도 좋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를 믿겠다는 거지.


선적에 따른 결제대금은 60%로 18억에 이른다. 작은 돈이 아니다. 사장에게 보고 했다. 직원 월급과 하청업체 결제대금 등으로 회사의 자금여력이 빡빡할 때였고, 선적만 하면 18억이 바로 현금으로 꽂히게 되니 이 아니 좋을 것인가. 가뭄에 단비인 거지.


OK. 제조본부장을 찾았다. 삼성반도체 출신의 상무 왈, 조립은 완성되었고 소프트웨어 탑재와 이에 따른 구동 실험 등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지만 예정대로 문제없다고 했다.


OK. 연구소장을 찾았다. 선적전 마지막 단계, 장비의 성능 평가가 남아 있는데 그것은 연구소 소관이다. 연구소장 왈, 1주일 가지고는 부족하지만 2주면 되겠다고 했다. 시간을 흘렀고 4월 말이 다 되었다.


“소장님,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얼마나 심각합니까?” 성능평가 중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 팀장, 1달은 잡아야 할 것 같은데….. 회사 자금사정 때문에 선적을 늦출 수도 없고…. 난감한 상황이야…” 곤란해하는 연구소장을 뒤로하고 대표이사실을 찾았다.


“사장님, 이대로 실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선적을 미루시죠.”

“이 팀장, 안돼. 그러면 자금에 문제가 생겨. 그냥 문제없다고 하고 일단 실어. 프랑스에서 뒷감당하면 되니까!”

“안됩니다. 어떻게 뒷감당이 됩니까? 현지 업체가 한국처럼 빠르게 대응해주지도 않을 텐데 그냥 실으면 대형사고 납니다. 안됩니다.”

“실어. 뭐가 이렇게 말이 많아!”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보내시겠다면 저를 자르고 하십시오” 대표이사실을 나와 집으로 와 버렸다.


다음날, 대표이사는 나를 다시 불러 사과를 했고 내가 원하는 방법을 물었다.


“Dear Dr. Smith, 스미스 박사야, 자체 검사했다. 그런데 성능 평가에서 문제가 생겼다. 1달은 소요될 것 같다. 미안하다. 근데 돈은 좀 일부 먼저 줄 수 없겠냐? 30% 정도면 좋겠다. 만들고 평가하고 하느라 돈이 많이 들었거든. 좀 도와줘”


물론 영어로 썼다. 다음날 답장이 왔다. “James야 솔직한 상황 설명 고마워. 내부 검토했고 30% 보내 줄게. 장비 잘 마무리해줘. 고마워.”


장비는 잘 마무리되었고 프랑스 고객은 만족하여 독일 회사를 추천하였다. 독일회사는 5억을 더 하여 35억에 발주했다. 뮌헨에서 독일 맥주를 마음껏 먹어 보았다.


거짓말로 순간의 위기나 어려움은 모면할 수 있다. 그러나 작은 거짓말은 점점 더 큰 거짓말에 이르게 되고 결국 자기기만 상태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정직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힘이 들고 어렵고 불편하다. 그러나 시간은 정직의 편이서 시간이 지날수록 삶은 명확해지고 정직하기 더욱 쉬워진다.


<시간은 진실과 정직의 편이다>


작가의 이전글 졸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