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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문 Oct 15. 2016

첫째와 둘째

사랑과 관심이 죄다

오랜만에 친구와 통화를 했다. 하나뿐인 딸이 대학을 가고 사이가 나아지고 있다고 했다. 고3을 거치며 딸의 미래를 걱정하여 관심을 가졌던 게 화근으로 감정의 다툼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친구도 고3을 거치며 첫째 아들과 사이가 나빠졌는데 재수하며 사이가 회복되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의 외동아들은 이제야 아빠와 엄마의 사랑 차지 틈바구니에서 벗어났다. 아빠 엄마가 이혼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둘째다. 4살 차의 형이 있다. 형 덕분에 둘째인 나는 보다 자유롭게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형에게 감사하다. 내 아버지는 여느 아버지처럼 첫째에 거는 기대가 남달랐다. 그런 기대가 내내 부담이었던 형은 아버지와 반목했다. 그 반목은 오랫동안 이어졌고 골은 깊어갔다. 지금은 관계가 회복되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상봉한다. 그러나 갈라져 보수한 시멘트 같다.


자식과의 관계. 애증의 관계인 듯하다. 잘 되라고 관심을 가지지만 그 관심은 간섭이 되고 다툼이 되어 사이가 멀어지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둘째는 복이다. 처음 하는 부모 노릇을 첫째를 통해 배우고, 그 틈으로 둘째는 상대적으로 감정이 자유롭게 되기 때문이다. 대게 첫째 자식 농사는 둘째의 수확으로 보상을 받는다.


그런데 둘째가 사라졌다.  많은 친구들은 둘째가 없다. 나라의 지나친 관심도 한몫을 했다. 이제야 나라와 사회가 둘째와 셋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바람직한 일이다. 인구증가 때문만이 아니라  땅의 외로운 외동아들 딸들을 위해서 이다. 첫째에게도 축복이  것이다. 혼자 감당하던 관심의 부담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 서로 무죄다. 모두 무죄다. 다만 죄는 관심과 사랑일 것이다. 지나친 관심과 사랑이  죄일 것이다.


관심과 사랑도 결국 적당해야 한다. 뭐던 지나치면 안 좋다. 적당한 관심과 사랑, 그 틈으로 감정이 자유롭게 피어 날 것이다. 감정이 자유로우면 이성은 스스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감정이 자유로운 가운데 쌓아 올린 이성이어야 사고를 치지 않는다. 감정을 억압받고 공부만 한 엘리트는 그 감정을 돈으로 권력으로 보상받고자 오늘도 뉴스 속에 저리 난리다. 자유로운 감정을 줄 수 있는 그들의 부모는 이미 없기 때문이다.


감정이 자유로운 이성이 필요하다. 그래야 진짜다. 진짜는 감정을 받아주는 보모가 키운다. 그래야 진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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