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대학엔 시험지가 없다.

정의를 아는것과 말로 설명할수 있는 것의 차이점.

by 샌즈


전형적인 모범생

나는 이탈리아에서 과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다. 한국의 경쟁 위주 주입식 교육과 캐나다의 여유로운 교육 방식, 나는 늘상 그 두 문화 사이 어딘가에 있는 학생이었다. 두 나라 모두에서 학교를 다녔고, 두 나라의 시스템에 익숙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성실하고 예의바르다는 이유로 칭찬을 받았고, 캐나다에서는 계산기 없이 수학 문제를 푸는 내 모습에 모두 놀라워 하였다.


나는 전형적인 “모범생”이다.

교수님 말씀을 존중하고, 대학교에서는 항상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 불렸으니 말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단지 내가 나를 믿는 방식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모범적으로 행동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내가 자랑스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나의 자만심은 이탈리아에 유학을 온 뒤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정말 모범적인 학생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이탈리아 대학교에서 첫 기말고사를 치른 그날, 나는 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문제를 푸는 시험이 아니라, 말해야만 하는 시험.

시험인데 시험지는 없는 시험이었으니 말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가 ‘지식을 다루는 방식’ 자체에 회의감을 갖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 맞는지 말할 수 없다면 과연 이해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구술시험? 도대체 왜?

그렇다면 구술시험(Orale)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이탈리아 교육 시스템은 왜 이토록 구술시험을 고집하는 걸까?


이탈리아 대학에서의 구술시험은 단순한 평가 형식이 아니다. 이건 교수와 학생이 지식에 대해 직접 대화하는 과정이며, 학생이 그 주제를 얼마나 자기 언어로 재구성해 설명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미적분, 유기화학, 물리처럼 문제 풀이가 필요한 과목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풀이형 필기시험을 통과하더라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토론 형식의 구술시험을 거쳐야 ‘최종 합격’으로 인정받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기초수준의 물리학 같은 과목은, 풀이 패턴만 암기해도 일정 수준까지는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이는 한국 수능과 비슷하다. 반복 학습과 패턴 분석으로 정답에 도달하는 시스템.


그러나, 문제를 풀 수 있다고 해서 정말 그 학문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의 교수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학생이 지식을 내면화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사고로 전환했는지를 평가하고 싶어한다. 단어의 정의를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는 교수를 본 적이 없다.


교수는 1+1=2가 맞는지 물어보고, 그 사실을 증명해 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당연히 1+1=2죠" 라는 답변은 어쩌면 교수를 화나게 할 지도 모른다.

정말 완벽한 답안을 제시하고 교수를 만족 시켰다고 하더라도,

“What if–”로 시작하는 질문이 항상 이어지기도 한다.



“만약 실험실에 페놀프탈레인 인디케이터가 없다면,넌 어떻게 엔드포인트(EP)를 확인할 거야? 너 스스로 인디케이터를 만들 수 있겠어? 만들 수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 건지 설명해봐.”
“정량분석 중인데 calibration curve가 직선이 안 나와. 그런데 sample은 1억 원짜리 희귀 약물이야. 버릴 수도 없잖아. 교수님도 없어. 너 혼자야. 어떻게 할래?”


단순 암기나 pathway 외우기는 의미가 없다. 효소 이름을 헷갈리더라도 “그 h로 시작하는 효소요…” 정도로만 말하면, 교수는 감점은커녕 오히려 개념 흐름을 이해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본다.



질문지는 없다.

준비된 원고도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구술시험은 딱 세 개의 질문으로 구성된다.


“겨우 세 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세 질문은 교수가 끝까지 파고들기 위한 출발점일 뿐이다.



“왜 그렇게 생각해?”
“만약 그 조건이 달라진다면?”



교수는 학생의 첫 답변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Edgy Case를 제시하며, 학생의 생각이 끝이 어디인지 밀어 붙인다. 어떤 교수는 아예 주제를 자유롭게 정해오라고 하기도 한다. 30분 동안 교수 앞에서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설명하고, 그 과정에서 교수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며 학생이 얼마나 깊이 이해했는지를 분석한다. 언뜻 보면 Thesis Defense처럼 보이기도 할 정도이니, 그 스트레스와 부담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탈리아 대학에서, 시험은 더 이상 평가가 아니라 토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토론은, 결국 ‘지식이 말로 살아 움직이는가’를 보는 실험인 것이고 말이다.





지난학기 유기화학 수업시간
변화의 시작

이렇게 구술로만 시험을 본다는 환경의 변화는, 나에게 단지 공부 방법을 바꾸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지식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흔드는 경험이었고, 나는 적응하기 위해 변해야 했다. 살아 남아야 했으니..


1. 나는 암기를 내려놓았다.

단어를 기억한다고 해서 내가 그 학문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 오만이고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에게 내 지식을 ‘내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건 단지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그건 이해가 아니라 기억의 모방이였고, 지식이 아니라 내가 공부를 했다고 착각하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2. 나는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교수가 끊임없이 묻는 "왜"라는 질문에 대비하고자, 내 스스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공부하는 내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거지?”를 스스로 묻게 되었다.

놀랍게도 나의 이 작은 변화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공부 시간은 줄었는데, 자신감은 늘은 것이다. 시험 결과도 좋았다.

30 e lode, 유기화학 명예학생이라는 성취도 이루어 냈다.


내가 개념을 정말 이해했다는 확신은 ‘암기한 분량’이 아니라, ‘설명할 수 있는 구조’에서 오는 것이다.

지식을 구조화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지식을 외우는 것이 아닌 나의 재산으로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3. 나는 공부를 즐기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생각의 틀이 넓어졌다. 상자 밖에서 사고하게 되었고, 내가 가진 지식과 아이디어로 새로운 리서치를 제안하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의 프로젝트를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방향을 정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능동적인 공부법이, 학문 뿐만 아니라 행동과 자신감에도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적응은 힘들었지만, 나는 이탈리아 교육이 좋다.

나는 이탈리아 대학이 좋고, 이탈리아 교수님들의 시험 방식이 좋다.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힘을 길러 주었고,

좋은 과학자가 될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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