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눈에 소년은 둘도 없는 모범생이자 착실한 신부 지망생이다. 그러나 뒤에서는 남들 몰래 물건을 훔치는가 하면, 둘도 없는 친구를 배신하기도 한다. 하루하루 위태로운 삶 위에 놓인 소년은 십자가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무능한 아버지를 죽여주시고, 못난 어머니를 벌해주시고, 이런 나를 품어주세요"
김태용 감독의 영화 '거인'은 열 일곱 소년의 처절한 성장통을 담아냈다. 부모의 품을 떠나 일찍이 '이삭의 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자란 영재(최우식 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존'이다. 자신을 키워준 부모의 물건을 훔쳐놓고, 앞에서는 착실한 행동과 표정으로 미소 짓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소년에게는 일종의 생존 방식이다.
과연 무엇이 소년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일할 능력이 됨에도 불구하고 온갖 핑계를 대며 일을 하지 않는 아버지, 그리고 온갖 일에 시달리다 몸이 망가져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 아직 미성년자인 영재와 그의 동생은 녹록치 않은 형편 속에서 자꾸만 삶의 바닥으로 미끄러졌을 것이다.
때문에 '이삭의 집'은 소년에게 일종의 한줄기 빛 같은 존재다. 그는 부모를 떠나 따듯한 밥과 튼튼한 집으로 향한다. 그곳엔 영재와 비슷한 처지의 또 다른 소년들이 모여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원장은 소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딜 가던 네가 제일 불쌍하다는 생각은 하지마."
카메라는 소년이 '이삭의 집'으로 향하게 된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이후의 삶을 비춤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짐작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영재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는 그가 지나온 삶이 그대로 묻어있다. 특히 "세상이 나한테 어쩜 이래"라는 대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영재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소년의 이루는 것들 중 가장 큰 감정은 '원망'이다. 원망의 화살은 부모에게로, 어른들에게로, 종국엔 세상에게로 무작정 뻗어나지만 결국엔 자신에게 닿는다. 이러한 감정의 움직임은 작품 말미에서 더욱 폭발한다.
영재는 자신도 모자라 동생까지 '이삭의 집'으로 보내려는 아버지를 향해 울며 소리치고 협박하다가도, 종국엔 원장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빈다.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던 소년이 눈물을 흘리며 무너지는 순간, 그저 한낮 어린 아이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배우 최우식은 한 인터뷰에서 "영재는 왜 저렇게 안간힘을 쓰면서까지 버티려고 할까. 무책임한 부모에 대한 복수심일 수도 있고, 가여운 동생에 대한 책임감일 수도 있다. 부모를 증오하면서도 가족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에 대한 공포도 있다"고 말했다.
치열한 생존 뒤에는 또 하나의 두려움이 몸을 감추고 있다. 영재에게는 '가족'이 바로 그러하다. 무책임한 부모를 스스로 놓아버리고 '이삭의 집'으로 향했을 때 그는 더 나은 가족의 형태를 꿈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물을 필요가 있다. 과연 소년 스스로가 부모를 버린 것일까? 위태롭고 잔혹한 세상에 내던져진 소년에게 선택지는 오직 하나다. 버려지느니 스스로 버리는 것을 택하는 편이 낫다는 선택. 그것이 오늘의 소년을 살아있게 한다.
영화는 영재가 '이삭의 집'을 떠나면서 막을 내린다. 온갖 눈칫밥을 먹고도 몸 뉘일 곳 하나는 필요했던 소년의 여정은 끝이 난다.
하지만 그의 여정이 완전히 끝난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눈물을 꾹 참으며 "출발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영재의 모습에서 우리는 아직 그려지지 않은 그의 미래를 상상한다.
소년은 이제 어디로 가는가. 세상 속 울타리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소년의 다음 장은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직 소년의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불행 같다가도, 어쩌면 일말의 희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위태로운 경계에서, 소년은 스스로 다음 장을 향해 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