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괜찮을까? ; 수능 3부작 1편
한국에서는 시험 하나로 인생이 달라진다.
몇 년간 꾸준히 성장하던 학생이 수능 하루를 망쳐 전혀 다른 길로 가기도 하고,
앞으로의 장기적인 미래를 결정하기 딱 좋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서라'는 청춘을 입시에만 투자하기도 한다. 반대로 부진하던 학생이 운 좋게 맞힌 몇 문제로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진학하며 인생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이 구조가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나도 그 중 하나고.
과정은 사라지고, 순간만 남는다
수능 이전까지 많은 학생들은 분명히 성장한다.
성적도, 태도도, 이해도도. 이전에 못 맞췄던 것을 맞추고, 낯 가리던 친구가 어렵지 않게 팀플을 진행하고.
그러나 수능은 이 과정을 기록하지 않는다. 오직 ‘대학 수학 능력’이라는 이름의 결과만을 남긴다.
문제는 그 하루가 단순히 대학 진학 여부를 넘어, 한 사람의 자기 인식과 자존감까지 규정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것도, 만 18세라는 어리다 못해 사회생활 한번 안 해본 나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20대의 소중한 시간과 비용을 입시에 투자하는 이유는, 물론 꿈을 위해 투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하루의 결과가 이후 삶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는 것은 열등감의 감각
어떤 학생은 입시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다시 일어난다. 어찌 됐든 20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므로, 즐기면서, 또 다른 미래를 그려 나가면서. 그러나 어떤 학생은 “나는 원래 안 되는 사람”이라는 하락된 자존감을 오랫동안 품고 살아간다.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해 휴학과 함께 수능의 세계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쯤 되면,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타이밍의 문제였을 수도 있고, 혹은 애초에 이 시험 체계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수능은 실력+alpha로 결정된다는 말이 있을까.
그럼에도 결과는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내면화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수능은 어디까지의 시험이어야 하는가
수능은 원래 지역 격차와 소득 격차를 최대한 배제하고(학교마다 내신 특징부터 생활기록부를 위한 활동 등이 천차만별이니 말이다), 학생의 ‘수학 능력’ 자체를 보기 위한 시험이었다. 최소한 설계는 그랬고, 그 이상의 기능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수능은 반복 응시가 가능한 사람(a.k.a.N수생)들이나, 사교육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할 수 있는 사람들을 걸러내지 못하고 있다. 소위 하는 말로, '고인물'들을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되어간다는 뜻이다.
하나의 시험 결과가 대학 서열, 직업 기회, 사회적 인식까지 연쇄적으로 연결될 때, 수능은 불평등을 완화하는 장치가 아니라 불평등을 고정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꿔야 할까
문제는 시험의 존재가 아니다. 시험의 비중과 복원 가능성이다.
하루의 결과가 몇 년의 노력을 압도해야 하는가. 개개인의 성장은 어떻게 기록하고 평가할 것인가.
실패했을 때, 그 비용을 되돌릴 수 있는 구조는 존재하는가.
나도 아직은 대학원생이자 사회 초년생이기에, 함부로 확답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수능 체계가 '개개인의 성장'을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비용을 '되돌리'기가 쉬운 구조가 아니라고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의 실패 = 인생의 낙인”이라는 등식을 약화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정착될 필요가 있단 얘기다.
시험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경고다.
능력은 평가해야겠지만, 우연은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제도도 한 사람을 단 한 번의 순간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