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기억은 나를 '붙잡는' 걸까 '밀어주'는 걸까
연말이면 많이들 하는 것이 있다. '연말 회고', 혹은 연말 '결산'.
요즘은 아예 연말용 문답도 나올 만큼 회고가 연례행사로 자리잡은 듯 하다. 물론, 회고라는 건 중요하다.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인사이트를 얻었으며 어떻게 살지 계획을 세우는 장이 되니 말이다.
이 글에선 회고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회고를 '왜 하는가', 더 나아가 과거에 '갇혀 사는 것'과 과거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의 경계를 적어보려는 것이다.
나는 어린이집을 다니던 때부터, 대학교 합격통지를 받던 스무 살 2월까지, 한 동네에서 열여섯 해를 살았다. 다시 말해 그런 동네를 20살이라는 모든 것이 '새로울' 나이에 떠나온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동네가, 이사간 집과는 꽤 먼데, 여전히 많은 친구들이 사는 곳이자 회사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코로나 시절 친구들이 사는 만큼 기회가 되면 최대한 오려고 했던 곳이자, 이제는 일부러 찾지는 않지만, 어쩌다 경유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느려지는 곳이다.
그 동네에는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있다.
처음 교복을 입고 등교하던 날, 시험을 망치고 집에 돌아오던 날, 친구들과 아무 이유 없이 웃던 저녁들까지.기억은 늘 현재의 속도로 걸어오다가,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과거의 온도로 바뀐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 떠난 지 6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이 동네를 떠올리는 게 맞나?’
지금의 나는 성인이고, 대학원생이고, 20대 중반이다.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나이이다. 혹시 과거에 갇혀 사는 건 아닐까, 하는 회의감이 끝없이 몰려온다. ‘왕년에 잘 나갔다’는 말처럼, 이미 지나간 시간에 기대어 현재를 버티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곧 반박이 따라온다. 이렇게까지 생각하면서 과거를 느껴야 하나 싶을 만큼 비참하지만, 수많은 반박이 떠오르는 건 주체가 안 된다.
나는 이 동네에, 과거의 손길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현실을 살다가 잠깐 스쳐 지나갈 뿐이다. 회상만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분명 현실에선 치열하게 현재의 고민을 하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한다. 지금의 나는 분명 그때보다 다른 고민을 하고, 다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이 동네에서 성장했다. 이곳에서 처음 실패했고, 처음 버텼고, 처음으로 ‘그래도 다시 해볼 수 있다’는 감각을 배웠다. 시험을 잘 본 기억도,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났던 기억도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래서 가끔 너무 힘들면, 이렇게 얘기할 수는 있다.
그래도 나, 예전에 해낸 적 있잖아.
과거에 머무는 말이 아니라, 미래로 가기 위해 과거를 끌어오는 말이다.
그렇다면 같은 ‘과거를 떠올림’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과거에 갇힌 것처럼 보이고, 어떤 사람은 과거를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걸까. 그 경계는 뭘까.
차이는 아마 이것일 것이다- 그 기억이 지금의 나를 멈추게 하는지, 아니면 움직이게 하는지.
과거를 생각하는 그 순간은 둘 다 일시정지할지언정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는지 여부일 것이다.
과거가 현재를 대신 설명하기 시작할 때, 과거가 나의 최고점이자 끝이 될 때(a.k.a.'왕년'), 그 기억은 사람을 붙잡는다. 반대로, 과거가 지금의 선택을 감당할 힘을 줄 때, 과거가 ‘가능했다’는 증거로 남아 있을 때, 그 기억은 사람을 밀어준다.
나는 여전히 그 동네를 떠올린다.
하지만 돌아가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거기까지 걸어온 내가 있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떠날 때 모습에서, 정말 많은 경험을 쌓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대학원이라는 선택을 하고 내 연구주제를 찾아 떠나는 여정 위의 모습까지를 보면서 말이다. 과거는 머무를 곳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때 잠깐 돌아보는 지면이자 2보 전진을 위한 후퇴 속 후퇴에 가깝다.
발을 딛되, 눕지는 않는 곳.
그래서 나는 묻고 또 묻는다. 이 기억은 나를 붙잡고 있는가, 아니면 다음 발을 내딛게 하는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아직 과거에 갇힌 게 아니다. 회고는, 그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