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연구와 현실 사이

회사 일을 겸직하는 석사생의 자격지심은 끝이 없었지만

by 델리만쥬

연구든, 회사 실무이든, ‘맞다’고 말하기까지의 시간을 존중하는 법을 그렇게 배워가고 있다. 석사의 절반이 지나갔지만, 그렇게 '존중하자'는 태도를 탑재(?)하자, 가장 먼저 달라진 건 회사에서의 태도였다.


저번에 살짝 얘기했지만, 회사에서는 판단이 늘 현재형으로 요구된다. 금주 내로, 이번 분기 안에, 혹은 이 회의가 끝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조차 결론은 내려져야 하고, 그 결론은 곧 실행으로 이어진다. 현실은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에서의 판단은 언제나 완결된 문장처럼 보인다. 더 미룰 수 없다는 이유로, 혹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그 판단들이 정말 ‘끝난’ 것인지는 늘 조금 의문이었다. 실행 이후에도 데이터는 계속 쌓이고, 결과는 예상과 어긋나며, 그때는 보이지 않던 변수들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 잘난 AI모델들도 고도화하느라 바쁜 거 보면... 어쩌면 당연할지도. 회사에서의 판단은 빠르지만, 그만큼 수정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한 번의 판단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일은 실상 없는 것이고, 일단 움직이고 나서 다시 조정한다는 감각에 가깝다. 현실의 판단은 종종 확신보다는 책임에 의해 내려진다.


이 지점에서 연구자로서의 나와 회사원으로서의 나는 자주 마주 선다. 연구에서는 섣부른 판단이 곧 오류가 된다. 충분한 근거 없이 내린 결론은 쉽게 무너지고, 그 무너짐은 내 노션에 살짝 남을 뿐, 결국은 winner, 즉 정말 robust했던 애만 고스란히 논문으로 남는다. 그래서 연구는 시간을 요구한다. 더 많은 데이터, 더 엄격한 검증,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반복적인 의심. 연구에서의 판단은 늦을수록 신중해지고, 신중할수록 설득력을 갖는다. 반면 현실에서는 그 ‘늦음’ 자체가 리스크가 된다.


나는 이 두 세계 사이에 서 있다. 하나는 시간을 요구하는 task임에도 빠른 진행과 결정을 요구하고, 다른 하나는 판단을 최대한 늦추라고 말한다. 예전의 나는 이 간극을 일종의 분열로 느꼈다. 어디에 서 있든 불완전해 보였고,어느 쪽에서도 완전히 잘하고 있지 못하다는 감각이 따라다녔다. 여담이지만, 인스타, 링크드인을 한동안 못 들어갔다. 내가 너무 초라해서 링크드인에서 자극을 받고자 했는데 링크드인엔 나랑 같은 위치에서 껑충 뛰어오른 사람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려고 한다. 이 간극 자체가 나의 위치일지도 모른다고. 연구와 현실 사이에서 망설일 수 있다는 것은, 판단의 무게를 동시에 두 기준으로 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어쩌면 내가 배우고 있는 것은 ‘언제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판단은 서둘러야 하고, 어떤 판단은 끝까지 늦춰야 하는지를 구분하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회사에서의 판단이 나를 현실에 붙잡아 두는 힘이라면, 연구에서의 판단은 나를 쉽게 확신하지 않게 만드는 브레이크다. 나는 그 사이에서, 아직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상태로 서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중간 지대를 섣불리 떠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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