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자의 자본주의사회 생존기 (9 - 2024, 가을 1)
1) KAIST 4대 명강의
"Supply chain의 가장 하단에서 시작된 균열이 upstream으로 올라가면서 파동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데, time to stability가 길어...."
교수님의 설명이 여기까지 왔을 때, 한 10초쯤 정신을 놓았던 것 같다. 젠장. 10초 정신 놓은 걸 다시 따라가려면 10분이 넘게 걸릴 텐데,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이 자리에 왜 앉아있냐 하면, 이 역시 MBA의 꽃 네트워킹 때문인 거다. 원우회가 준비하는 공식적인 자리 외에도, MBA는 각종 사조직이 난무한다. 지역별/취미별/나이별/회사별/학부별/직군별 모임들. 마치 네트워킹을 안 하면 몸에 가시라도 돋는 듯하다. KAIST가 그나마 면학 분위기가 좋다는데, 다른 대학들은 얼마나 심할까 싶다. 여하튼 '90 모임'에서 나온 귀한 정보에 따르면, KAIST에는 '4대 명강의'가 있단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공급사슬관리(SCM) 김보원 교수님 수업이었다. 명강의라는 건 틀림없었다. 다만 '개 빡센' 게 문제였을 뿐.
봄 학기와 여름 학기, 동기들과 다 함께 필수 과목을 소화했던 시기가 지나고, 가을 학기부터는 수업 과목을 보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동기들과 흩어져 각자의 '취향껏' 수업을 선택하다 보니, 오히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동기들과 수업 시간마다 얼굴을 마주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학기 초반 어색함은 사라지고, 이렇게 취향으로 엮인 동기들과는 자연스레 유대감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날더러 이 수업을 왜 듣냐며, 실무에 도움이 되기는 하냐고 묻는 동기들도 있었다. 사실 나는 수업을 선택할 때 깊은 고민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카이스트의 웬만한 수업은 제조와 IT에 치중되어 있어, 드라마 기획이라는 내 업무에 100% 도움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교수님의 전달력과 강의 내용, 그리고 수업 분위기가 좋다면(물론 시험과 과제의 양이 합리적인지도 중요하지만) 일단 듣기로 한다.
그리고 이 수업은 통계나 재무회계에 비해 훨씬 실무에 대한 통찰이 강해서 좋았다. 실라버스 4주 차 '디즈니가 폭수를 인수한 전략'에 관한 케이스 스터디를 다룰 날이 기다려졌다. SCM 전문가 동기들은 이 수업이 일반적인 SCM 수업과는 다르다고 평했다. 그러고 보면 MBA 수업은 나 같은 본투비 문과생이나 자연계열 출신의 원우들의 만족도가 높다. 학부 때 경영학을 전공한 원우들은 수업 내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말이 많았겠지만, 경영 지식이 전무한 완전 백지상태인 나는 오히려 배우는 즐거움이 있었다.
물론 디즈니 케이스가 가장 흥미롭기는 했지만, 내가 첫 발표를 맡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콘텐츠 산업의 벨류 체인은 나도 강의시간에 종종 다루던 주제기는 하다. 그러나 30년간 SCM을 연구해 오신 교수님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발표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나를 보고 친한 동기언니가 왜 이렇게 떨었냐고 물었다. 평소 사람들 앞에서 잘 떨지 않는 나인데. 몇백 명 앞에서도 잘 말하는 나인데. 유달리 MBA 원우들 앞에만 서면 그렇게 떨고는 한다.
2) 콘텐츠 부의 공식
전통적인 제조업 SCM이 물리적인 원자재와 물류를 다룬다면, 드라마 산업의 SCM은 작가, 감독, 대본, 배우, 스탭 등의 창의적 자원과 음악, 영상 등의 디지털 자산을 관리해 고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목표다. 기획부터 납품까지 최소 2년, 길게는 10년이 걸리는 거대한 프로젝트이기에, 이 과정에서 SCM의 중요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드라마 산업의 Value Chain 역시 Supply > Manufacturing > Distribution > Sales 단계로 구분된다. 내가 속한 제작사는 Manufacturing(제작) 단계로, Supply 단계의 작가/감독/스탭이 제공한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활용하여 드라마를 기획하고 만든다.
이 밸류 체인은 제작사에게 비극이었다. 1961년 KBS 설립 이후, 제작 및 배급은 방송사(레거시 미디어 플랫폼)를 중심으로 폐쇄적으로 이루어졌다. 2010년대 이후 제작사가 기획의 주도권을 가져왔지만, 여전히 방송사의 편성을 받아야만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편성이란 백억이 넘는 제작비를 방송사에게 투자받는 행위였기 때문이기에. 방송사는 자연스럽게 IP(저작재산권)를 가져갔고, 제작사는 일정 제작 마진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드라마를 만들며 낭만을 외쳐도, 결국 돈줄에 종속되어 고통을 겪었던 이유다.
하지만 2016년, 글로벌 OTT 플랫폼 넷플릭스가 대한민국에 상륙하면서 방송사 독점의 배급 구조가 완전히 재편되었다. 글로벌 OTT 플랫폼은 사업 모델을 오리지널 작품 제작과 방영권(라이선스) 구매로 이분화했는데, 방영권 구매 모델이 바로 제작사들에게 새로운 활로를 뚫어주었다. 제작사는 이제 전 세계에 직접 세일즈를 할 수 있으며, 다양한 부가사업을 통해 수익을 계속 창출해 낼 수 있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손에 쥐었다.
결국 제작사가 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아 존재 이유를 증명하려면 다른 길은 없다. 드라마를 만들고 끝내는 게 아니라, IP를 꽉 잡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플랫폼에 휘둘리지 않고, 그 드라마로 계속해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콘텐츠 사업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
IP 활용을 제일 잘하는 곳이 바로 디즈니다.
디즈니는 콘텐츠 제작 산업에서 독보적인 IP 중심 모델을 구축하며 전 세계적으로 성공했다. 단순히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고 파는 데서 그치지 않고, IP를 활용한 '경험'이라는 부가 가치를 끊임없이 창출하는 데 집중한다. 디즈니의 슈퍼 IP는, 극장에서 영화로 만나고 디즈니+에서 드라마로 만나고, 디즈니랜드에서 어트랙션과 각종 캐릭터 굿즈로 만날 수 있다. 콘텐츠의 라이프사이클을 최대한 늘려서, 단순한 배급 수익을 넘어 다각도로 돈을 버는 수익 구조를 완벽하게 구축한 것이다.
SCM 수업을 통해 기업의 존재 이유는 Value(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편성되지 않는 대본을 만들고, 편성되지 않는 배우를 캐스팅하면 안 된다. 결국 '팔리는 콘텐츠'를 만들어야만 제작사는 그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거다. 2013년, SBS 면접에서 '돈 버는 예술가'가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었다. 면접관이 오히려 되물었다. "돈 버는 예술가가 뭐죠?" 10년 만에 비로소 그 질문에 완벽하게 대답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공급사슬관리 수업 내용이 아무리 좋았어도, 학기가 종료되자 내 머리는 또다시 비워지고 말았다. 수업을 들은 지 벌써 1년. 이 글을 쓰려고 과거 필기자료들을 뒤적거리니 너무나 새롭다. 하지만 이 SCM의 통찰이야말로 내가 브런치 연재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처음으로 9학점 수강에 도전했던 가을 학기였다. 빨간 날이 많아서 다행이었지, 9학점을 듣는 건 다시는 할 짓이 못 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다음 학기에 나는 또다시 9학점을 신청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