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자의 자본주의사회 생존기 (12 - 2024, 겨울 1)
1) 불확실성의 늪에 빠진 취향의 시장
강의를 하다 보면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팔리는 드라마'가 뭐냐고. 정답은 없다.
드라마 산업은 Buyer와 User가 다른 시장이다. 드라마를 보는 건 개별 시청자들이지만, 우리(=드라마 제작사)가 판매해야 하는 대상은 플랫폼의 편성권자들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편성은 지극히 그들의 취향에 달려 있었다. 모두가 뜰 거라 예상한 드라마가 망하고, 아무도 기대 안 했던 드라마가 대박을 치기도 하는 게 이 '취향의 시장'이다. 다행히도 나의 취향은 대중의 취향과 맞아떨어지는 편이었다. 드라마가 방송되기 전 대본만 봐도 시청자들의 반응이 어느 정도 예측됐다. 기획하는 드라마들은 곧잘 편성회의를 통과했고, 확신에 차서 작가들과 대본을 만들어나갔다.
그런데 산업이 위축되며 시장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편성회의를 통과해도 투심위에서 떨어지는 일이 잦아졌다. 편성권자들조차 본인 취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해외에 팔리는 배우가 캐스팅이 되어야만 편성을 받는다. 더러운 세상이었다. 나는 재밌는 걸 알아보는 눈이 분명한데, 왜 6개월 넘게 편성이 되질 않는가. 이 불확실성에 환멸을 느끼며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MBA 동기들은 크게 세 부류다. 승진이 목적이거나, 이직이 목적이거나, 창업이 목적이거나. 어느 경우든 커리어 고민이 많은 사람들이다. 한 동기 언니가 유튜브 '퇴사한 이형'을 추천해 준 뒤로, 내 유튜브는 이직 알고리즘으로 뒤덮였다. 이때 처음 체감했다. 산업군별로 연봉 테이블이 다르다는 것을. 커리어 컨설턴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연봉 수직 상승은 '뜨는 산업군'으로 가야 가능하다고.'지는 산업군'에서는 답이 없다고.
롱폼 드라마는 명백히 지는 산업군이었다.
드라마 업계를 떠나야 하나,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나.
전통의 강호 반도체, 고령화로 뜰 수밖에 없는 바이오. 이 두 산업군은 어문학을 전공한 내가 쉽게 옮겨갈 수 없는 곳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그러고 보면, 고등학교 1학년 담임쌤이 이과를 가라고 했을 때 말을 들을 걸 그랬다. "저는 이과를 졸업해서 되고 싶은 게 의사밖에 없는데, 제가 의대를 갈 성적이 되지는 않잖아요." 의사 말고도 할 게 이렇게나 많은데.
그리고 나머지 뜨는 산업군이 바로 AI였다.
2) AI 언어 옹알이
KAIST MBA는 홍릉에서만 수업이 있는 게 아니다. 최적의 입지를 갖춘 여의도 IFC 17층에서도 수업을 한다. 신촌에 사는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접근성이었다. 심지어 10년 동안 방송관계자들과 작가님들을 만나며 수도 없이 다녔던 IFC몰. 편하게 학교를 다녀볼 수 있겠다 싶었다.
겨울학기 여의도 수업을 찾아보다 'Introduction to Deep Learning'이 눈에 들어왔다. AI 산업군에 대한 관심이 피어오르던 시기였다. 실라버스를 열어봤다. 'MBA 과정의 컴퓨터 공학 비전공자들에게 쉽게 딥러닝 개념을 파악하게 해 주고, 향후 현업에서 딥러닝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게 될지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이거다 싶었다. 비록 파이썬이 뭔지도 모르는, 태어나서 코딩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이번 기회에 컴퓨터 언어를 배워보자 싶었다.
첫 수업은 국내 최고의 자연어 처리 전문가들 이야기로 시작됐다. 박규병 대표님, 이기창 작가님. 비 공대생도 충분히 AI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사례였다. 실제로 그들은 국문과 학사 졸업생이었다. 2012년 학부 언어학 전공 수업 때 교수님께서 연구실로 들어오라고 제안했던 기억이 났다. 네이버 사전 만드는 팀이었는데, 갔으면 비슷한 커리어패스를 밟을 수 있었을까. 그럼 인생이 달라졌을까. 타임머신이 없으니 알 수는 없다.
다만 간과했던 게 있었다. AI에 누구나 쉽게 접근을 할 수 있지만, AI의 전문가가 되는 건 소수다. 그들은 공학 석사를 취득했거나 10년 넘게 컴퓨터 언어를 체득한 사람들이었다. 반면 겨울학기 딥러닝 수업은 고작 6일. 컴퓨터 언어를 배우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1990년에는 컴퓨터가 없어서 못 배웠다는 핑계가 통했습니다. 그러나 2024년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죠."
맞다.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AI 학습 환경이다. 머신? google colab으로 무료. 심지어 gemini가 오류도 알아서 잡아준다. 데이터? Kaggle에서 무료. 지식? Youtube, Coursera에서 무료. 물론 나는 0.5억을 내고 KAIST에서 유료로 습득하고 있는 중이지만.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AI 덕분에 누구나 쉽게 제작에 뛰어들 수 있다. 그러나 '선택받는 콘텐츠'를 만드는 건 여전히 소수다. 부자든 가난하든 모든 인간에게는 공평하게 하루 24시간이라는 한정된 자원이 주어진다. 그 시간 안에 내 콘텐츠가 선택받는 것이 중요하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밤 10시 드라마라는 공식이 있었다. SBS, KBS, MBC 채널들끼리만 시청률 경쟁을 했다. 밤 10시에 드라마를 보는 것 말고 또 뭘 할 수 있었겠나.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Youtube, Netflix 등 볼거리가 넘쳐나고, 밤 10시에만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낮 어디에서든 시청 가능하다. 날씨가 좋으면 달리기를 하거나 맛있는 걸 먹으러 갈 수도 있다. 이제 드라마는 수많은 '활동'과 경쟁해야 한다. 무한 경쟁 시대다.
그렇다면 내 콘텐츠를 선택받게 만들려면?
AI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게 아니라, AI의 고용주가 되어야 한다.
다시 의욕이 샘솟았다. 컴퓨터 언어도 결국은 언어일 테니까. 마치 프랑스어나 중국어를 처음 배우던 것처럼 print 함수를 차근차근 따라갔다. 다행히 중간기말 시험은 없고, 개인 과제 1개와 팀 발표 1개만 하면 됐다. 평소 생각하던 앱을 이번 기회에 실제로 구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오산이었다.
희망 회로는 2시간뿐이었다. 분명 강의안을 따라 print를 입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십 줄의 외계어가 등장했다. 난이도가 수직 상승했다. 평소 생각해 본 앱을 구현하기는커녕, 데이터사이언티스트 동기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발표를 마무리했다. 역시 MBA는 네트워킹이 답이다.
'AI는 나랑 안 맞아... 결국 콘텐츠 산업이 답인가...'
그렇게 포기할 뻔했다. 하지만 6개월 뒤, 예상치 못한 반전이 찾아왔다. 2025년 여름, '인공지능 비즈니스 전략' 수업을 듣게 됐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겨울학기 딥러닝 수업에서 기대했던 건 바로 이 내용이었다. AI를 어떻게 '비즈니스에 활용'할 것인가. 체계적인 코딩 실습도 포함한 '인비전'을 선수과목으로 듣고, 딥러닝 수업을 들었다면 훨씬 수월하게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을 텐데.
AI와 나는 안 맞는 게 아니었다. 단지 만나는 방식이 잘못됐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