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자의 자본주의 사회 생존기 (13 - 2024, 겨울 2)
1) 2박 3일, 개꿀 대전행
입학설명회 때 가장 기대했던 건 해외 필드트립이었다. 여름학기 1주일 동안 해외 명문 MBA를 방문해 수업을 듣고 현지 기업을 탐방하는 프로그램. 3년 동안 2번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학부 교환학생 시절의 낭만이 떠올라 절대 놓치지 말자 다짐했다.
24년 여름. 첫 번째 기회는 런던 LBS였지만, 하필 파리 올림픽 시즌이라 비행기도 숙소도 말도 안 되게 비쌌다.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괜찮다. 아직 2년 남았으니까. 그런데 25년 여름, 회사 일정에 막혀 또다시 날려버렸다. 이제 남은 기회는 단 한 번뿐. 내년엔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가리라.
그래서 더 반가웠다. "MBA 원우들이 공학자에게 직접 기술 트렌드를 듣는 수업을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이미 경영대에도 4차 산업혁명을 다루는 수업들이 많지만, 공대 교수님들의 생생한 현장 경험이 담긴 강의는 색다른 시각을 제공할 것으로 믿거든요." 단기간에 여러 본원 교수님을 설득하고 스케줄을 조율해 일정을 확정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도, 책임교수님은 결국 해내셨다. 겨울학기 2박 3일, 1.5학점 교과목인 대전 본원 특강이 개설되었다.
당초 예상했던 수목금 수업이면 좋았겠지만, 월화수 대전행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그 주 목요일엔 조직설계와 혁신 기말 발표가 있었고, 금요일엔 우리 원우회가 주최하는 연합 신년회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2박 3일 만에 1.5학점을 수강할 수 있다는 건 '개꿀', 극강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수업 아닌가. 해외 필드트립을 다녀오지 않은 내게는 동기들과 처음으로 같이 가는 '여행'이기도 했다.
에어비앤비를 잡은 우리는, 일요일에 미리 내려가 잔뜩 여행 기분을 만끽했다. 대전의 명물 성심당 딸기 시루, 유성구 온천 족욕공원, 태평소 국밥의 갈비찜과 육사시미까지. 다음날 수업은 일단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던져놓고, 현재에 집중했다. 언덕도 없고 건물들이 널찍하게 들어선 대전이 참 맘에 들었다. 갑천 따라 과학관들이 들어서 있는 모습을 보자니 마치 평양 같기도 했다. 한적한 길거리에는 사람도 잘 없고. 아쉽게도 이땐 아직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이었다. 한창 러닝에 빠져있는 지금이라면 아침마다 뛰러 다녔을 텐데.
카이스트 본원은 '대학 캠퍼스'였다. 대전에 비교하면 홍릉은 마치 고등학교 같았다. 홍릉 교수님들도 좋지만, 대전 본원의 교수님들은 '찐 공돌이 천재'들이었다. 본투비 문과생인 나는, 내게 부족한 지점을 지닌 이과생들에게 엄청난 매력을 느낀다. 애정이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연구 내용을 설명하는 대전 교수님들께 반할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본인들의 연구를 즐거워하고 재밌어하는 느낌이었다. 신기했다.
이러한 교수님들의 깊이 있는 통찰이 담긴 수업 내용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오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비단 2박 3일간의 특강뿐만이 아니다. 1년 동안 홍릉캠퍼스에서 들었던 SCM, 리더십, 소비자행동분석 등 전혀 다른 분야의 수업들 역시 씨실과 날실처럼 엮이고 있었다. 서로 관련 없어 보이던 지식들이 하나로 꿰어지며, '아, 이거였구나'하는 짜릿한 깨달음을 얻었던 순간이 많았다.
2) 찐 공돌이들에게 Deep Dive
기계공학과 백그라운드에 항공과 전자의 전문성을 더한 심현철 교수님께서는 눈앞에서 미니 드론의 시연을 보여주셨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같다고 했다. 조종 장치도 없이 트랙킹 기술로 실내에서 날아다니는 미니드론이 내게는 정말 마법처럼 느껴졌다.
사실 내게 가장 필요한 기술은 자율주행차다. 이동시간에 대본을 읽는 일이 많아 버스나 지하철에서 업무를 보거나 급한 경우엔 택시를 탄다. 농담처럼 자율주행차가 보편화되면 차를 사겠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교수님께서 보여주신 상암동 자율주행 시연을 우연히 근처에서 목격한 적도 있어서, 기술은 이미 상용화될 만큼 발전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상용화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대한민국이 '규제의 민국'이기 때문이라니. 말을 잘 듣는 국민성이 여기서는 단점이 된 셈이다.
드론, 자율주행, 로봇. 첨단 기술들이 쏟아지는 강의실에 앉아 있자니 마치 미래에 온 기분이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가장 기대했던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메타버스 수업이었다.
"메타버스는 한 물 갔잖아?"
종종 듣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운택 교수님의 강의를 들려주고 싶다. 교수님은 메타버스를 '4차 산업혁명의 기술들이 집합한 공간이자, 현실과 디지털을 연결하는 통합적 플랫폼'이라 설명하셨다. '메타버스'라는 단어는 사라질지 몰라도, 메타버스를 구현했던 기술은 남는다는 것. 포스트 메타버스 시대의 핵심은, 현실과 가상 세계를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확장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롱폼 콘텐츠를 기획해 온 내 소망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비자들과 가까이서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교수님은 생성형 AI를 통한 콘텐츠 제작을 미래로 보셨지만, 나는 오히려 가까운 미래에는 디즈니나 아이돌 팬덤처럼 '슈퍼 IP'를 가진 회사들이 메타버스에 진입할 때 소비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할 것이라 생각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계속 문화기술대학원 수업을 검색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름을 받은 것 같았다. 콘텐츠 산업은 확장되는데 롱폼 드라마 산업은 줄어드는 시점이라 커리어의 넥스트를 고민하던 중이었다. 단순히 기술을 소개하는 게 아니라,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도구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게 만든 강의였다.
배상민 교수님은 미디어에 여러 번 나오셨지만 난 집사부일체나 세바시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강의가 더욱 강렬했다. 교수님은 디자인을 상품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창의적이고 혁신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으로 정의하셨다. 결국 디자인은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교수님이 소개하신 3H(Heart, Head, Hand)는 꿈과 열정, 지식과 경험, 나눔과 공헌을 의미한다. 이제 기업에게 사회적 가치 창출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교수님이 실제로 진행하신 '사랑의 필터 프로젝트'나 'boxchool' 컨테이너 박스는 모두 사회적 가치를 듬뿍 담은 프로젝트들이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단순히 물건을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만드는 방법을 공유해 지역사회에 자립심과 지속 가능한 변화를 가져다줬다는 점이다.
강의 막바지에는 거의 울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약점은 역발상으로 최고의 강점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눈물샘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가장 고민하던 지점이 바로 '너무 솔직해서 피해를 본다'는 점이었다. 누군가는 사회생활을 더 배우라고 했고, 누군가는 '딴지도 환영'이라며 핀잔을 줬다. 대다수 상사들은 그저 말없이 고과를 낮게 줬다. '나는 조직 생활과 맞지 않는 사람이구나, 무슨 일을 하며 먹고살아야 하나' 고민했던 시기였다.
단점을 보완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단점을 강점으로 전환시키라는 발상의 전환. 그것이 곧 혁신이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디자인뿐 아니라 모든 문제 해결 과정에서 적용할 수 있는 가치 있는 교훈이었다.
나는 기존의 조직 생활과 맞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게 맞는 조직을 만들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