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를 찾아서

낭만주의자의 자본주의 사회 생존기 (11 - 2024, 가을 3)

by 레브뉘

1) 오히려 좋아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꽤나 당혹스러웠다. 사람이 어떻게 아무 이유 없이 멀어질 수가 있지? 분명 말하지 못하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겠지. 그러나 한때 엄청 친밀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싸우지도 않고 연락이 뜸해지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이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기에, 나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과 만남의 빈도가 줄어들 수밖에 없고, 대화 주제도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2023년 겨울. 모아놓은 돈도 얼마 없으면서 0.5억을 들여서 MBA를 진학하겠다는 나를 두고, 친구들은 걱정 반 우려 반의 시선을 보내곤 했다. 석사 학위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꼭 MBA를 나와야만 사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제대로 배우는 건 없으면서 술만 마시러 다니는 곳 아니냐고. 어쩌면 질투의 감정이 조금 섞여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0.5억을 투자하겠다는 건 내게도 엄청난 결심이었다. 2024년 봄학기와 여름학기 수업을 듣고 나서, 가을학기 수강신청을 하게 되니, 등록금에 대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KAIST는 한 학기 권장 수강 학점이 6학점, 최대 수강 가능 학점은 9학점이다. 학점을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학점당 수강료가 저렴해진다는 계산법이 등장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욕심을 부렸다. 그래도 아무리 등록금이 아까워도 생업과 학업을 병행하는 PMBA(공식 명칭은 Professional MBA지만, 피땀눈물 MBA라는 별명이 더 어울린다)인지라, 빨간 날이 많지 않았다면 엄두를 내진 못했을 거다. 공급사슬관리와 리더십. 전공필수 두 과목만 듣기에는 너무 재밌어 보이는 수업들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소비자 행동 분석'이었다. 어떤 수업들이 진짜 KAIST 4대 명강의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 수업이 명강의 중 하나였다.


누군가의 추천만으로는 웬만하면 수업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람마다 '좋다'의 기준은 다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좋은 수업의 기준은 이렇다. 1) 교수님의 강의력(전달력)이 좋고 2) 수업 내용이 알차며 3) 커리큘럼이 체계적이고 4) 학생들의 다양한 의견이 존중되어 5) 활발하게 토론에 참여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을 때. 소비자 행동 분석은 위 5개 항목 중 4개를 만족하는 좋은 강의였다.


중간/기말고사 대체 발표는 당일 랜덤으로 정해졌다. 교수님은 확신의 P가 아닐까.


소비자 행동 분석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없다. 대신 팀 프로젝트로만 평가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팀을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했다. 협상론 때 여러 기수와 전공이 자연스럽게 밍글링 되었던 기억이 좋아, 이번에도 랜덤으로 배정해 달라 요청드렸다. 그런데 귀차니즘 가득한 조교가 학번 순으로 자를 줄은 몰랐지.


소비자 행동 분석 수업을 들었던 동기들은 총 4명. 그중 3명이 같은 조에 배정받았다. 나 홀로 IMMS(정보경영프로그램) 선배님들과 한 조가 되었다. 걱정이 가득했다. 첫 학기 마케팅 수업 팀플은 주말 내내 반나절 넘게 회의를 할 정도로 빡셌다. 팀플 중간에 소개팅을 간다고 먼저 나간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 학기 내내 계속 뭐라 할 정도로. 지금 생각해 보면 인생 동반자를 찾는 게 마케팅 수업 팀플보다야 훨씬 중요한 것이었음에도 말이다. 이런 빡센 팀플을 타 전공의 선배님들과 해야 한다니.


오히려 좋았다. 3학기 차 선배들은 요령이 가득했다. 굉장히 효율적으로 움직였고, 업무 분장을 별도로 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딱딱 손발이 맞아떨어졌다. 발표 주제는 궁금한 소비자의 행동의 이유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핑크퐁에 재직 중인 선배님과 드라마 기획을 하고 있는 나. 우리는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궁금한 소비자 행동을 분석해 보기로 했다.


2) 덕질의 심리학


"아이돌 굿즈에 커스터마이징을 왜 할까?"


1세대 아이돌 HOT는 흰색, 젝스키스는 노란색, GOD는 하늘색. 풍선 색으로 팬덤의 정체성을 표현했다. 핑클과 동방신기의 팬덤이 서로 펄 레드 풍선 색을 유지하려 다투던 일이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소속감을 나타내는 굿즈에 커스터마이징을 하다니? 평균 연령 30대 후반의 우리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검증하기 위한 가설을 세워보았다. 첫째, 커스터마이징은 개성을 표현하기 위한 일환이다. 둘째, 희소성 있는 한정판 제품을 갖기 위함이다. 아이돌 팬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우선이었다. 직장 동료, 대학 동기, 고등학교 동창. 곳곳에 숨어 있는 '찐 아이돌 팬'들을 찾아 나섰다.


세대를 거듭하며 아이돌도 진화했고, 팬덤도 진화했다. 과거의 아이돌 팬들은 'ㅇㅇ팬' 그 자체가 중요했다면, 요즘 아이돌 팬들은 'ㅇㅇ팬인 나'를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단다. 첫 번째 가설이 검증된 셈이다. 마치 '회사'보다 '회사에서 일하는 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즘 MZ 세대의 정체성 욕구가 반영된 걸까. 두 번째 가설인 희소성에 대해서는 반응이 싸늘했다.


"역시 머글과는 대화가 안 통해."


보다 상세한 이유를 알기 위해 2차 가설을 세우고 설문을 돌렸다. 50명은 받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웬걸. 팬덤의 화력은 정말 대단했다. 마치 인기투표라도 하는 양, 우리 '아가'들의 인지도를 위하여 팬덤 내에서 스스로 설문을 널리 퍼트리고 있었던 거다. 하루 만에 목표 설문 양을 초과 달성했다.


데이터를 분석해 보니 꽤나 흥미로운 결과들이 나왔다. 핵심은 세대별 차이였다. 기존에는 아이돌 팬카페 운영진들이 단체로 굿즈를 제작했다면, 이제는 개개인이 자기 취향대로 만드는 시대가 된 거다. 세대가 어려질수록 굿즈를 커스터마이징 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즉, 개성 표현의 확장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대가 어려질수록 왜 개성표현을 확장하려고 하는지 파고들면 좋았겠지만, 중간발표가 코앞이라 아쉽게도 여기서 마무리해야 했다.



기말 발표는 중간발표의 연장선으로 엔터 분야를 한번 더 다루기로 했다. 또 하나의 이해가 안 되는 현상이 있었기 때문에.


"직접 만날 수도 없는 버추얼 아이돌 오프라인 행사에는 왜 가는 걸까."


역시 같은 방법으로 심층 인터뷰를 먼저 진행하고, 설문을 설계했다. 버추얼아이돌은 훨씬 생소한 분야였고, 1차 가설 대부분이 기각됐다. 설문 끝에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오타쿠의 대중화, 그러나 팬덤을 곁들인'


'소비자 행동 분석' 수업을 들은 지 1년이 지난 지금, 상세한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있다. 소비자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 마치 언어학에서 말하는 표층구조와 심층구조처럼 표면적인 이유가 아닌 심층적인 이유를 분석해야 하고, 소비자 스스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심층적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한 질문을 잘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돌이켜보면, 2024년 가을학기는 '왜'를 탐구하는 시간이었다. 리더십 수업에서도, 공급사슬관리에서도, 소비자 행동 분석에서도 강조한 5 whys. 세 수업은 모두 표면이 아닌 본질을 파고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깊이 있게 사고하는 힘을 기르라는 것. 일반 경영대학원이 아닌 MBA이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올바른 CEO 마인드를 기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개업을 잘하기 위해 MBA에 진학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 나의 심층을 들여다볼 필요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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