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문과생의 반격

낭만주의자의 자본주의 사회 생존기 (16 - 2025, 여름)

by 레브뉘

1) 벗어날 수 없는 숫자의 늪


"PD님! ㅇㅇㅇ배우님이 우리 작품 출연하기로 하셨어요!"


2025년 1월, 대전에서 받은 전화 한 통은 현실감이 없었다. 휴가 중엔 웬만큼 큰 일이 아니고서야 전화를 하지 않는데. 6개월 넘게 캐스팅이 안 되던 작품의 캐스팅 소식은 정말로 큰 일이었다. 평소같았으면 뛸 듯이 기뻐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나보다. 앞으로 얼마나 험난한 나날이 벌어질지. 돌아온 서울에선 또 다른 작품의 캐스팅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작품 모두 2025년 9월 크랭크인. 올해도 여름 해외 필드트립은 물 건너갔다. 심지어 가을학기에는 어쩌면 휴학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봄학기에 무리해서 9학점을 들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남은 게 많지 않았다. 여름을 불태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장 이수 학점 3학점의 두 배인 6학점.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해외연수를 못 가게 된 것도 살짝 열이 받았다. 분명 필드트립 신청기간 까지는, 두 작품 모두 9월에 촬영이 시작이었다. 촬영 3개월 전인 대본을 뽑아내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쁠 예정이었다. 그러나 어려워진 산업 탓에 쉽사리 편성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제작팀에서는 편성이 안 될 때마다 대본에 문제를 제기했다.


사실 대본의 문제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편성 절차는 'GLC(기획회의) -> 편성회의 -> 투자심의'로 이루어진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은 모두 편성회의까지 통과했다. 내가 만든 대본이 시장에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투자심의에서 미끄러지면서 촬영이 계속 미뤄졌다. 과거에 투자심의는 형식적인 절차였으나, 요즘엔 유통팀이 해외에 안 팔리는 배우라며 종종 재캐스팅을 요구한다. 그런데 내게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편성 확정이 나질 않자 제작팀에 대한 불신도 날로 쌓여갔다. 아무리 재밌는 대본을 만들면 뭐하나. 편성을 받아오질 못하는데.


인생은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여름학기 해외 필드트립을 신청할 걸 그랬다. 월화수목금 매일 홍릉으로 향하는 게 처음엔 부담이었지만,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데는 제격이었다. 막연하게 꿈만 꾸던 창업 아이템도 이때 구체화할 수 있었다.


또다시 등장한 수학 공식. 가격전략은 분명 마케팅 트랙인데, 왜 재무 트랙같은 느낌.


그렇게 선택한 가격전략 수업은 또다시 문과생의 한계를 절감한 순간이었다. 현업에 바로 적용할 수도 없는 과목이라 '내가 왜 이걸 듣고 있지' 싶었다. 쏟아지는 통계/수학/회계에 정신을 못 차리다보니, 어느새 기말 시험 날이 다가왔다. 수업시간에 보이지도 않던 공대 오빠들이 우리 조 조장님께 질문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2분 정도 설명을 들으니 한 방에 내용을 이해하더라. 너무 허탈했다. 나는 수업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는데. 여름 학기 내내 이해하느라 골머리를 썩였는데.


역시나 시험지를 제출하는 동시에 또다시 머리는 리셋되었다. 그럼에도 가격전략 수업에서 확실히 얻은 것이 있다. 마진을 남기는 방법은 최악의 가격전략이라는 것. 지금까지 플랫폼은 IP를 가져가고 제작사에 일정 마진을 남겨주는 방식으로 편성을 해 왔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최악의 가격을 받은 셈이다.


가치를 값으로 환산하는 방식이 최적의 가격전략이었다. 나는 '팔리는 배우'의 가치를 어떻게 수치화하고, 대본의 가치를 어떻게 값으로 환산하는지 그 방법론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6번의 수업에서 배운 건 이미 숫자로 환산된 가치를 가지고 계산하는 방법뿐이었다. 환산하는 과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2) AI의 고용주가 되자


겨울학기 딥러닝의 트라우마가 있어서, AI 관련 수업을 수강하는 데 두려움이 앞섰다. 첫 수업을 찍먹해보고 들을지 말지 결정해보자는 마음으로 홍릉으로 향했다. 6개월만에 '인공지능 비즈니스 전략'에서 재회한 AI는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다. 내가 딥러닝 수업에서 기대했던 게 바로 이거였지. print 함수부터 시작하는 체계적인 교수님의 실습 커리큘럼을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나는 파이썬을 할 줄 알게 되었다. 교수법의 문제였던 걸까. AI 시대에 발맞게 Google Colab에서 gemini가 알아서 오류를 잡아주는 편리한 세상이라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파이썬 자신감도 귀중했지만, 더 큰 수확은 따로 있었다. 파이널 리포트 주제는 AI를 산업에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평소 고민하던 문제, 가격전략 수업에서 답을 찾지 못했던 그 질문. 대본의 가치를 어떻게 가격으로 환산할 것인가. 나는 '흥행 성공률을 높이는 AI 기반 드라마 시나리오 분석 TOOL'을 주제로 정했다.


드라마는 본질적으로 취향의 산업이다. 작품의 성공은 시청자들의 선호와 감정, 문화적 공감대에 달렸고, 이런 것들을 숫자로 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까지 드라마 산업의 핵심 의사결정-작품 승인, 편성 시기, 제작 규모 등-은 소수 전문가의 경험과 직관에 맡겨져 왔다. 산업에 불확실성을 안겨준 구조였다.


기획/편성 단계에서 작품의 흥행 성공률을 높이고, 의사결정에 객관적 근거를 제공하는 툴. 단기적으로는 대본 검토 방식을 효율화하고, 장기적으로는 제작 실패율을 낮추며 투자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실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건 아니었다. 프로포절만 제출하면 되는 과제였다. 그러나 데이터 구성, 전처리, AI 모델 설계, 시각화까지 구체적인 프로그래밍 방법을 모두 구상해보았다.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실제 구현까지 꼭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다.


데이터 구성은 세 가지로 나눴다. 1) 샘플 대본 텍스트 데이터 2) 장르/방영 시기/제작비 등의 메타 데이터 3) 콘텐츠 평가표 기반 정량 데이터


겨울학기 때 AI 산업으로 뛰어드는 건 어렵겠다고 판단했다면, 여름학기 때는 다른 결론을 내렸다. 드라마 산업에 AI를 적극 활용하면 된다는 자신감. AI를 활용하기 위해 공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드라마 기획자로서 AI를 활용하는 나만의 길을 걸어가면 된다. 문과생만의 강점-언어 감각, 스토리텔링, 사람에 대한 이해-이 AI 시대에 오히려 더 중요해질지도 모른다. AI 시대에 문학도가 공학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신사업개발은 시험 없이 과제 제출만 하면 되는 수업이었다. 역시 평소 생각하던 창업 아이템을 그대로 과제로 제출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동기들은 숫자보다 스토리텔링을 강조하는 교수님의 방식을 낯설어했지만, 나는 오히려 반가웠다.


내가 제출한 아이템은 'AI 기반 스토리 IP 인큐베이팅 에이전시'였다. 신인 작가와 감독이 상업 시장에 진입하기까지는 평균 3~5년이 걸린다. 기존 에이전시와 제작사들은 대체로 검증된 경력자 위주로 계약하고, 공모전이나 교육 프로그램은 1회성 지원에 그친다. 신인에게는 실질적인 제작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회사의 사정상 신인 작가들과의 작업 빈도가 높았던 나였다. 자연스럽게 '데뷔 가속기' 모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발굴부터 시장 데뷔까지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 신인 창작자의 경쟁력을 단기간에 끌어올려 '신선하지만 완성도 높은' IP를 공급하는 것.


아이템을 구체화했던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달리기 좋은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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