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자의 자본주의사회 생존기 (17 - 2025, 가을)
1) 나만의 수업, 쇼핑
"이번에는 합격하면 수업 열심히 들어야 해요?"
면접 때 교수님이 하신 말이 주문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그래서인지 입학 초에는 한 번 수업을 선택하면 중도 포기는 안 되고 무조건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24년 입학생 기준, 반 학년 등록금은 820만 원. 반 학년 당 권장 수강 학점이 9학점인 것을 감안하면, 수업 하나에 270만 원짜리. 허투루 고를 수는 없었다.
후회하지 않을 수업을 택하기 위해 선배님들께 물어보며 정보를 많이 수집했다. 그런데 학기가 반복되며 남들이 좋다는 수업이 내게는 안 맞았던 경험이 쌓여갔다.
그래서 이번 학기에는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수업 쇼핑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변경 기간인 첫 주는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과목들을 모두 직접 들어본다. 이후 한 학기 최대 수강 학점인 9학점을 남겨둔다. 혹시라도 한 과목을 드롭할 수도 있으니. 그렇게 2025년 9월 첫 주, 수목금토월 홍릉으로 향했다.
5일간의 쇼핑을 마치고, 최종 시간표에 남은 것은 '기술혁신과 전략적 경영', '스케일업 조직 경영', '세무 전략'. 이번 학기도 세부 트랙 이수를 고려하지는 않았다. 기준은 명확했다. 과제와 시험 부담이 적으면서도 실용적인 것. 비록 9월 크랭크인은 물 건너갔지만, 두 작품 모두 여전히 편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든 상황이 바뀌어 급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이번 학기만큼은 빡센 과목들을 듣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렇게 '마케팅 조사 분석론'과 '디지털 전략'이 시간표에서 사라졌다.
'디지털 전략'은 수업 시작 10분 만에 바로 빼기로 결정했다. 공급사슬관리에서 다뤘던 내용이 일부 반복되었고, 교수님의 전달력도 아쉬웠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IMMS 전공 수업이라, PMBA는 나 포함 단 둘. 시험은 없었지만, 동기들도 하나 없는 토요일 수업에서 외로이 과제와 팀플을 해낼 자신이 없었다.
'마케팅 조사 분석론' 교수님은 뒤처지는 사람 없이 모두를 품고 가시는 스타일이라, 숫자에 익숙하지 않아도 끝까지 잘 따라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었다. 여름학기 인공지능 비즈니스 전략 수업 덕에 파이썬에도 자신감이 붙었겠다, 한번 들어보자 싶었다. 수업 시작 10분 만에 오산임을 깨달았다. 외계어 같은 통계 용어들이 쏟아졌다. 결정적으로, 이걸 실무에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2) 선택과 집중
2025년 가을학기, 처음으로 중간고사 직전 한 과목을 드롭하기로 결정했다. 아쉽긴 했다. 아무리 여유롭게 듣자 결심했어도, 270만 원을 포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왕복 2시간 넘게 홍릉을 오가는 시간에 차라리 브런치를 쓰자 싶었다. 마침 브런치 출판 프로젝트 공모전 마감일도 다가오고 있었다. 봄학기 '경영 전략' 수업의 핵심 메시지, '선택과 집중'을 실천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떤 과목을 드롭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중간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스케일업 조직 경영'은 생존이 목표였던 스타트업을 벗어나, 스케일업 단계의 조직이 인사 시스템을 갖춰가는 과정을 다뤘다. 교수님의 뛰어난 강의 전달 능력, 체계적인 커리큘럼, 무엇보다 일방적인 전달형 강의가 아닌 토론형 수업이라는 점이 좋았다. 창업이 졸업 요건인 임팩트 MBA 원우들의 색다른 시각도 기대됐다. 중간·기말 시험 없이 팀플만으로 끝. 팀 배정이 랜덤이라는 것만 빼면 완벽했다. '스타트업을 위한 디자인 싱킹'에서 랜덤으로 배정되었다 최악의 팀원들을 만났던 경험이 있어, 걱정이 가득했다.
'세무 전략'은 재무 트랙을 피해 가던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재무트랙 수업이었다. 팀플도 과제도 없이 중간·기말 시험만 보면 끝. 물론 시험은 클로즈드 북이라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내용이 실생활에 바로 적용 가능하다는 엄청난 장점이 단점을 상쇄시키고도 남았다. 법인세는 회사를 차리려면 꼭 알아야 하고, 소득세는 당장 연말정산에 필요하다. 그러나 복병이 있었다. 금요일 수업. 카이스트 경영대학원은 원래 금요일에 수업이 없다. 각종 세미나와 행사 참여가 어려워진다. 과연 이 수업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고민 끝에 결정했다. '기술혁신과 전략적 경영'을 드롭하기로. 시작은 분명 꿀이었다. 실라버스에는 토론형 강의라고 적혀있긴 했지만, 연륜이 가득하신 교수님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순식간에 3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문제는 내용이었다. 내 직무에는 도통 적용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 내용들. 모 동기는 '기술'도, '혁신'도, '전략'도 없는 수업이라 평하기도 했다. 실라버스에 없던 과제도 너무 많이 생겨났다. 중간·기말 시험이 아무리 오픈북이어도, 봄학기 창업과 법의 악몽이 되풀이될 것만 같았다.
'세무 전략'을 시간표에 남긴 것이 과연 잘한 선택이었을까. 교수님께서는 세법은 매년 바뀌어서 세무 공무원들도 다 외우지 못한다고 하셨다. 디테일한 내용까지 달달 외울 필요는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막상 시험 문제를 받으니,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세무 전략을 제시하는 문제가 나왔다. 달달 암기를 해야만 제대로 된 답을 쓸 수 있는 문제였다. MBA 재학 후 처음으로 평균보다 한참 아래인 점수가 나왔다. 불만을 제기하려고 했으나, 거의 만점인 사람도 여럿이란다. 누군가는 잘 봤으니 시험 문제에는 문제가 없었던 걸까. 젠장.
게으른 P 인간인 나는, 효율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중간고사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억울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이번엔 나름 공부를 한다고 했다. 방향을 잘못 잡아 문제였지. 게다가 민화 전시 기간과도 겹쳤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왔고, 손님 맞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핑계를 대 본다. 기말고사를 아예 포기하느냐, 올인해서 중간고사를 만회하느냐. 또다시 선택과 집중을 할 시간이 다가왔다.
올해 내가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달리기를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1분도 달리기 힘들었는데, 꾸준히 뛰다 보니 어느새 10km를 완주하고 있었다. 달리기를 하며 인생을 배웠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다. 크랭크인이 기약 없이 미뤄진 탓에 민화 전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화 전시를 한 탓에 세무 시험공부를 원하는 만큼 하지는 못했다. 한 과목을 드롭한 게 아까웠지만, 그 덕에 브런치를 쓸 시간이 났다.
일희일비하지 말자. 인생은 단거리 질주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다. 장거리 달리기를 잘하려면 페이스 조절이 필수다. 기획 후 론칭까지 최소 3년이 걸리는 롱폼 드라마야말로 더욱 장거리 달리기처럼 페이스 조절이 필요하다. 조급해지지 말자. 숨차게 남들을 뒤따라가지 말자.
내 페이스대로 달리다 보니 여러 기회가 보이기 시작했고,
어느새 훌쩍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