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경영의 언어

낭만주의자의 자본주의 사회 생존기 (7 - 2024, 봄)

by 레브뉘

1) 낯설고 설레는 첫 만남


몰려오는 각종 이별수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드라마 산업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파리에서의 교환학생이 자본주의 사회에 던져지기 전 마지막 도피였다면, KAIST PMBA는 드라마 산업이라는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한 경영 지식이라는 무기를 장착하는 과정이었다.


자의로 회사를 옮긴 적도 없던 지난 10년간, 7명의 대표가 내린 예측 불가능하고 비합리적인 결정에 울고 웃어야 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의중에 좌지우지되고 싶지 않았다. 2023년 12월, 8번째 대표님이 부임하셨다. MBA는 이 8번째 대표에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낯설어도 너무 낯설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늘 여성 비율이 높은 조직이 익숙했다. 영불과였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비상9'였던 대학교 시절까지 남녀 비율은 1:2. 심지어 기획 PD 중에서는 가뭄에 콩 나듯 남자 PD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KAIST PMBA 강의실은 정반대였다.


인원 규모도 예상 밖이었다. 입학설명회에서는 동기들이 80명 정도라고 했는데, 막상 OT 장소에 도착하니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연세대나 고려대보다 적은 인원이 끈끈하게 공부하며 네트워킹한다는 점이 매력 포인트였는데?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MBA 꽃은 역시 네트워킹이니, 동기가 많은 것도 좋다며 스스로 위안했다.


그리고 곧, 100명이 넘는 동기들이 가나다순으로 1분씩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대기업의 재무, 기술, 전략, 엔지니어 등으로 이루어진 '숫자의 세계'에 속한 전문가들. 나의 드라마 기획 PD라는 타이틀이 이곳에서 얼마나 특이한 이력인지 깨닫게 되었다. 내 차례가 되어 100명의 동기들 앞에 섰다. '쟤, 여기 왜 온 거지.'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2024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만들었던 자기소개 PPT


"사주에 역마살이 4개나 있는데, 한 회사에서 8번째로 바뀐 대표님과 함께 10년째 드라마를 만들고 있습니다. 26년도에는 제 회사를 차려 더 이상 누군가의 결정에 좌지우지되지 않으려고 해요. 차린 회사를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PMBA에 입학했습니다. 수능 때도 경제를 선택하지 않아, 경영/경제 지식이라곤 중학교 때 배운 수요공급 곡선이 전부라서 걱정이 큰데, 많이 도와주세요."


2) 숫자로 세상을 읽는 연습


"수요 공급 곡선만 알면 다 아는 거죠."


OT날 내 자기소개를 들었던 교수님의 유쾌한 농담이었다. 하필 MBA의 첫 수업은 '경영통계분석'이었는데, 내가 정말로 하나도 모를 줄은 교수님도 모르셨을 것이다. 드라마 현장의 '컷, Ok. 다음 씬'이 훨씬 익숙했던 지난 10년을 뒤로하고, '시그마(Σ)', '뮤(μ)', 'CLT(중심극한정리)' 같은 외계어로 가득한 낯선 교실에 앉아 있자니 머리가 아파왔다. 이제 시작인데. 처음부터 포기할 수는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야간으로 수업을 들어 따로 공부할 시간도 없었다. 수업 시간에 초 집중을 하는 수밖에.


한 학기 내내 맨 앞자리에서 수업을 들었다. 교수님은 매우 부담스러우셨을 거다. 수업 시간 중간중간 내가 이해를 잘하고 있는지 체크하셨다.


"박 원우님처럼 수학을 안 한 사람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니, 더 이상 설명 않고 넘어가도록 할게요."


저 나름 수능 수리 영역은 1등급이었는데요? 10년도 훨씬 더 전에 본 시험이라 기억이 안 나서 그렇지. 물론 경영통계를 배운 적이 없기는 하지만.


"통계 몰라도 걱정 마세요. 사는 데는 지장이 없어요."


이건 학점도 장학금도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 교수님은 본인이 대한민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통계를 잘 가르친다고 하셨지만, 훗날 다른 수업에서 통계를 다시 만나서야 제대로 이해한 개념들이 많다. 내가 잘 아는 것과 남에게 잘 설명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다행히 MBA의 꽃인 네트워킹 덕을 톡톡히 보았다. 통계 수업은 너무 슬펐지만, 친절한 동기들에게 개인 과외를 받으며 과제와 시험을 따라갔다.


1717750668058.jpg 친절한 동기의 경영통계분석 과외노트


봄 학기가 끝나자, 거짓말처럼 통계 수업의 복잡한 공식들이 머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하나 남은 게 있었다. 데이터 자체가 의미 있다기보다는,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해야 하는지가 핵심이라는 깨달음. 데이터 없이 감으로만 드라마를 만들던 선배들을 많이 보아왔다. 감에 의존하는 드라마 산업에서도 데이터를 활용해 성공의 '확률'을 높일 방법은 없을까. 드라마 산업에서 도망치고 싶다던 나는, 결국 이 어려운 통계 수업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드라마 산업의 미래를 떠올리고 있었다.


3) 마케팅: 낭만주의자의 언어 재정의


다행히 봄학기엔 '경영통계분석'처럼 숫자에 압도당하는 수업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케팅 수업은 훨씬 따라가기 수월했다. 드라마 기획 PD로서 늘 캐릭터의 감정선을 다뤄왔던 내게, 마케팅은 낯선 외계어라기보다는 내가 가장 잘하는 언어의 경영학적 정의였다.


그동안 드라마 제작사에서 마케팅팀은 주로 PPL(간접광고)만 따오는 영업의 영역으로 인식되어 왔다. 제작비 충당을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MBA에서 배운 마케팅은 달랐다.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을 사로잡는 것이 마케팅의 본질이었다. 단순히 상품을 팔기 위한 전략적 사고를 하는 것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고객의 페인포인트(Pain Point)'를 찾아 해결해 주는 것 말이다. 고객의 페인포인트를 잘 해결한다면, 설령 기술이 못 따라가도 선택받는 경우가 있다고.


어쩌면 드라마 기획이야말로 마케팅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행위가 아닐까. 시청자의 결핍과 욕구를 정확히 포착해, 대리만족, 통쾌함, 위로, 공감 같은 정서적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내가 강의시간에 항상 강조했던 내용이 아닌가.


웰메이드 작품보다 시청률이 훨씬 잘 나오는 완성도 낮은 드라마들이 생각났다. 만약 이런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다면 '나는 더 이상 드라마를 만들지 못할 것 같다'고 좌절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MBA에서 배운 경영학이 역설적으로 통찰을 줄 줄이야. 그 드라마들은 바로 이 '페인포인트'를 시원하게 긁어준 작품들이었기에 시청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낭만주의자로서의 나의 기획 철학이, 경영학적 언어로 재정의되는 봄학기였다.


MBA의 가치는 비단 강의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입학설명회 때 학장님은 등록금 0.5억 원의 가치를 얻어가는 것은 오롯이 자기 하기 나름이라고 하셨다. 물론 MBA의 꽃은 네트워킹이다.


그런데 원우회 활동은, 분명 나의 계획에 없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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