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전공하고 영화일을 하지 않다가 가끔씩 영화 생각이 나서 쓰는 글
영화를 전공했다. 가끔씩 그 사실을 까먹기도 하는데, 알고보면 그렇다. 영국에 7년이나 살았었다는 사실을 가끔씩 까먹는 것처럼, 영화를 공부했다는 사실도 까마득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따금 빈 상영관에서 좋은 영화를 만날 때, 영화에 대한 책을 읽게 될 때, 영화제의 포스터를 볼 때, 그 작은 상영관 뒷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상할 때 여전히 나의 근간 어딘가에 영화가 있다고 생각하다.
왜 영화를 전공했냐고 하면, 나는 원래는 언론사에서 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기소개서에도 종종 쓰는 이야기인데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용산 전자상가 어디에선가 아빠에게 선물로 JVC 6mm 캠코더를 선물받았다. 그 카메라를 들고 졸업작품으로 학교 홍보영상을 찍었는데, 삼각대랑 카메라를 들고다니는 희열 같은 것이 있었다. 처음으로 두꺼운 영상편집에 대한 책과 당시에는 테이프로 촬영한걸 일일이 컴퓨터로 캡쳐해서 옮기고 클립으로 나누고 소니베가스니 프리미어니 하는 프로그램을 다운받아서 편집하고, 포토샵으로 타이틀도 만들고 그러니까 스스로 그렇게 움직일 열정이 있었다. 카메라를 보면 심장이 뛸 때가 있었고, 무언가 완성품을 만들어 보여준다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찍었던 기억이 있는데, 밤새도록 준비하고 촬영하고 싸우기도하고 각종 변수들에 대처하기도하고 그런 일련의 일들이 엄청나게 즐거웠다. 그래서 영화도 영상을 만드는 일도 참 좋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영화과에 간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한국에서는 언론정보학과를 들어갔고, 오히려 영상과 관련된 일은 하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간 후로는 카메라를 잡은 적이 없었다. 광고학회에 들어가서 경쟁PT를 했고, 여행동아리에 들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대학생활은 길지 않았다. 늘 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다른 생각만 했다. 이상하게 학교생활에 그렇게 정을 붙이지 못했고, 어딘가로 떠나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결국 영국으로 대학을 다시 가게 되었는데, 미디어 분야로 전공을 알아보다가 영화전공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언론정보나 미디어나 영화나 비슷한 것 아니겟나 하고 생각했다가, 오히려 영화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영화에 대해서 영어로 말하고 토론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 쉽지는 않았다. 영화학은 철학과 미학에 가까웠고, 인문예술은 언어의 영역이라 표현을 할 때마다 한계를 느꼈다. 그렇지만 영화뽕을 맞아 허우적거리면서도 절대 영화를 놓고 싶지 않았던 영화학도였다. 여전히 영화를 찍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많은 영화를 봤다. 유감스럽게도 모든 영화가 좋은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일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마음 어딘가에는 '영화를 꼭 찍어야지' 하고 숨겨놓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정작 나는 유튜브에 올리는 영상 하나에도 머뭇거려질 때가 있다.
영화를 전공하면서도 영화제에서 일을 많이 했는데, 영화과를 졸업하고 나서도 영화제에서 일을 했다. 영화제에서 일을 하면서 영화만큼이나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좋아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빈 관객석이 좋았고, 개막식과 폐막식의 상영 후 바깥에서는 리셉션이 한창일 때 상영관에 남아 정리하는 시간도 좋았다. 영화관 어딘가의 창고에서 리플렛과 스탠딩배너를 이리저리로 들고다니는 시간이나 근처에서 사온 샌드위치로 대충 끼니를 때우던 시간도 생각난다. 리셉션이 끝나면 남은 와인과 샴페인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늦게 포장한 음식을 두고 스탭들과 함께 일어난 별별일들을 이야기했다. 물론이지 많이 미화된 것은 사실이다.
영화제가 끝난 후로는 영화계를 사실상 떠났다. 그것이 마지막일거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으로 호기심이 생기는 일을 선택했고, 사실 그 일은 영화와는 조금도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그 다음일도 그 다음일도 그랬다. 그래서 영화랑은 점점 더 멀어지는구나, 가끔씩 영화관에 와야지 가끔씩 영화제를 찾아가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일을 하면서 영화와는 정말 일말의 연결고리도 없는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내가 하고싶은거 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적어도 내가 궁금한 일, 호기심이 남아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영화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하고 있는 일 자체는 영화와 관련된 일은 아니지만, 결국에는 영상 콘텐츠 관련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문득 영화관에서 지금 다니는 회사의 타이틀을 보았을 때 '내가 돌고 돌아서 영화사에 와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또 다음 행보야 전혀 알 수가 없지만, 지금은 나의 관심이 머무르는 분야에 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다.
언제든 상영관은 이상한 위로가 된다. 유명하지 않은 영화제에서 마침 그날 반짝이는 제목을 가진 영화를 골라 조금 일찍 빈 상영관에 앉아 생각보다 정말 괜찮은 영화를 보았을 때가 참 좋다. 도시마다 숨어있는 영화관을 찾아가는 일도 좋다. 우연히 서점에서 좋은 책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과도 비슷한데,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혹은 크게 다른 세상 사람들의 시선, 생각, 말, 표정, 공기, 감정이 화면에 떠있는 감각이 좋다. 내용에 몰입할 때도 있고, 천장이나 상영관을 두리번 거리며 그날 그 순간 이 공간에서 재생되는 영화와 앉아있는 나에 대하여 생각할 때도 있다. 그래서 여전히 조금 위로가 필요한 날이면 가장 먼저 영화를 찾는다. 그리고 그럴 때 영화학교를 다니던 때를 종종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