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책 이야기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사랑을 이룬 이들은 어쨌든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스무 살의 나는 생각했었다.
결국 내게 주어진 행운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서로의 이해가, 오해였음을 깨닫지 않아도 좋았다는 것…
해서 고스란히 서로가 이해한 서로를 영원히 간직할 수 있었다는 것…
아무런 내색 없이, 마음 놓고 그녀가 울 수 있도록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그녀의 눈물 밑에 펼쳐 주었다.
따뜻한 벽난로를 등지고서도, 해서 내 마음은 한 장의 손수건처럼 자꾸만 젖어들었다.
-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의 파반느 14p~15p
살면서 딱 두 번 첫눈에 반한 적이 있다. 처음 첫눈에 반한 사람은 고등학교 때 학원 선생님이었는데 얼굴도 목소리도 이태곤을 닮아 너무 멋있었다. 한예종에 가고 싶었던 난 당시 엄마아빠를 조르고 졸라 실기학원을 다녔었다. 예술 계통에 있는 강사 선생님들은 메가스터디 선생님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잘생기고 어른스러운 분위기에 여유롭고 다정한 말투와 중저음의 목소리까지 모든 게 다 멋있었다. 어느 날 학원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 물어봤다.
"쌤 여자친구 있으세요?"
선생님은 생각지 못했던 질문이라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아니ㅎㅎ"
고2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연예인이 아닌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그저 그런 또래 애들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멋있는 어른 남자를 말이다. 그땐 휴대폰에 휴대폰줄이라고 귀여운 키링 같은 걸 매달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는데, 용돈을 모아 귀여운 핸드폰줄도 선물하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쪽지와 함께 책상에 올려두곤 했다. 처음 사랑에 빠진 여고생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며칠 후 선생님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고 학원을 나서는 선생님께 인사를 하며 따라나섰다. 우리는 집 가는 방향도 같았다. 운명임에 틀림없었다. 한참을 걷다 용기를 내 말했다.
"저 선생님 좋아해요.. 저랑 사귀어요."
쌤은 또 웃으며 대답했다. "안돼."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태어나 처음 한 고백이 무색하게 바로 거절을 당했다.
"왜요? 쌤은 저 안 좋아요?"
"ㅎㅎ 쌤도 xx 너무 예쁘고 좋지.. 근데 안돼."
서로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없는 남자와 남자친구가 없는 여자가 왜 사귀면 안 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맨스라는 드라마에서 김하늘이 김재원에게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라고 말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간접경험했었기에 선생님은 선생님이고 난 학생이라는 게 걸림돌이 될 수 있겠다는 예상은 했었다. 그래서 슬펐지만 납득했다.
첫사랑은 허무하게 끝났지만 학원을 그만두거나 하지는 않았다. 배우는 게 좋았고, 거절은 당했지만 내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하며 열심히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데 쌤이 내 옆에 오며 "가는 길이니까 쌤이 데려다줄게"라고 하는 것이었다. 거절은 당했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질 리 없었고 속으로 기뻐하며 쌤과 함께 걸었다. '이렇게까지 집 방향이 같다고? 이 정도면 같은 아파트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우리 만나볼까?"
너무 놀라 멈춰 서서 선생님을 쳐다보는데 너무 멋있어서 또 심장이 요동쳤다. 바로 좋다고 하려던 찰나 문득 선생님의 나이가 궁금했다.
"네 좋아요. 근데 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쌤은 잠깐 주저하다 말했다. "서른둘이야."
20대 초반, 많아야 20대 중반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의 나이는 생각보다 많이 많았다. 당시 30대는 결혼을 생각하는 나이라고 생각했고 난 매우 심각해졌다. 성인이 되려면 1년 반이나 남았고 성인이 되자마자 결혼을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쌤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네요.. 저는..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결혼?"
"네.. 저는 아직 결혼을 하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안 될 것 같아요.. 죄송해요.."
"ㅎㅎ 결혼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쉬운 게 아닌 건 알지만, 쌤이 너무 좋아서 쌤이 하자고 하면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안될 것 같아요."
"결혼하자고 안 할게."
"정말요?"
"응ㅎㅎ 그럼 괜찮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기적 같은데 우려되는 부분까지 바로 해결된 것이다.
그렇게 생애 첫 남자친구가 생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난 포커페이스가 안 되는 사람이다. 나쁜 걸 숨기는 것도 못하는데 좋은 걸 어떻게 티 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사랑이 스티커라면 온 세상에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쌤은 학원이 끝나면 늘 집 앞까지 데려다줬고 가끔은 예쁜 카페에서 카피도 마셨다. 세상이 반짝거렸다. 맨날 데려다주는 쌤이 너무 좋고 너무 고마웠던 어느 날, 난 뽀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할 말이 있다고 말하며 뽀뽀할 시간을 확보한 후 발을 들어 선생님 볼에 뽀뽀를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뽀뽀는 드라마에서 하는 것처럼 쪽! 하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은 뜨겁고 발은 안 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난 귓속말을 하려는 듯 고개를 숙여달라며 손짓했고 쌤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웬걸 선생님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심장은 더 쿵쾅거리고 너무 떨려서 뽀뽀는커녕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기다려주던 쌤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말하고 싶은지 알겠어ㅎㅎ 늦었으니까 오늘은 얼른 들어가.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이대로 쌤을 보낼 수 없었던 난 울상이 된 채 말했다.
"그게 아니라... 뽀뽀하려고 했는데 너무 떨려서 못하겠어요.."
선생님은 정말이지 빵 터졌다. 그러고는 내 양 볼을 잡았다. 내가 못한 뽀뽀를 해주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또 걱정이 됐다.
"저 지금 못생겨보일 것 같아요.."
"ㅎㅎ 아니야 전혀."
하고는 드라마에서 처럼 쪽! 입을 맞추고는 얼른 들어가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날 밤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데이트가 뭔지 알게 되었다. 그날 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집에 오자마자 교복도 벗지 않고 편지지를 꺼내 설레는 마음이 닳진 않을까 걱정하며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탁!
"왔니? 교복도 안 벗고 뭐 하니~"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편지 쓰는데 빠져있던 난 미처 편지지를 숨기지 못했다. 얼어붙은 나를 본 엄마는 바로 편지지를 낚아채려 핬고 난 뺏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열여덟 고등학생은 엄마에게 힘이 밀리지 않았다. 엄마는 바로 아빠를 불렀고 아빠의 힘은 이길 수 없었다. 그렇게 난 편지도 뺏기고 휴대폰도 뺏기고 학교도 못 가고 방 안에 갇혔다. 언니가 학교에 가며 몰래 전해준 소식은 정말이지 절망적이었다. 아빠가 그 선생님 경찰서에 신고했다고 그 학원도 난리 났다고. 엄마 아빠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선생님만 걱정됐던 난 식음을 전폐하며 소리쳤다. 나 혼자 좋아한 거라고! 선생님은 아무 잘못 없다고! 울며불며 며칠 밤을 소리쳤다.
- 1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