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로맨틱한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7. 등대1호, 스테인리스 북마크

by JEMMA

절그럭 절그럭.


"응? 이게 뭐야?"


동그란 통에 한가득 담겨 있는 우리를 처음 건네받은 그녀는 안에 든 게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통을 귀에 가져가 흔들어본다. 뚜껑을 열어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하나를 집어 올려 유심히 살피다 마침내 책에 꽂는 북마크라는 걸 알아차린다. 우리는 네 종류의 모양으로 된 스테인리스 재질의 조그마한 은색 책갈피들이다. 검지 손톱만 한 크기에 사각형 테두리를 두른 납작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사각형 테두리 안에는 등대, 보트, 튜브 따위의 모양이 들어 있다. 사각형 테두리를 뒤로 하고 각 모양을 앞으로 해서 종이에 끼우면 꽤 앙증맞은 책갈피가 된다. 우리는 오십 개나 되었기 때문에 여러 권의 책을 봐도 넉넉하게 꽂을 수 있다.


우리를 받을 때 그녀는 별로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안 들지도 않은 눈치였다. 뚱하면서도 약간의 호기심이 어린 표정.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사실 우린 그녀를 위한 선물이 아니었다. 어떤 행사를 위해 타인에게 홍보용 선물로 주라고 전해준 물건이었는데, 딱히 전해줄 사람이 없는 데다 그다지 홍보할 마음도 없었던 그녀는 아무에게도 주지 않은 채 책상 서랍 속에 방치하고는 행사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내버려 두었다. 책갈피가 필요한데 없을 때에도 그저 갱지 연습장을 주욱 찢어 대충 몇 번 접어서 책갈피 삼아 사용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우리를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그녀가 우리에게 다시 관심을 가진 것은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황금빛 노을이 촘촘한 그물 같은 때 탄 흰색 레이스 커튼에 걸려 힘겹게 빠져나와 하얀 책장과 책상과 그녀의 이마에 주황빛을 물들이던 어느 오후에,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의자에 주저앉아 오른손으로 책상 서랍을 멍하니 열었다 닫았다 하던 그녀가 문득 서랍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책갈피 통을 발견한 것이다. 무심하게 통을 열어 잠들어 있는 우리를 하나씩 꺼내서 그제야 무슨 모양이 있는지, 어떤 식으로 책에 끼우는 건지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드디어 책갈피 대신 끼워놓은 갱지를 빼내고 우리를 끼워 넣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녀의 의식 속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이 책 저책에 우리를 끼워놨다가 더러는 잃어버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남은 건 스무 개 남짓 될 것이다. 뒤늦게 책갈피를 회수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자기 정수리를 탁 치거나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되찾으러 가지는 않았다. 이미 누군가가 가져가 버렸을 거라는 생각과 아직 여분이 많이 남아 있으니 그렇게 필사적으로는 찾지 않는 것일 테다. 하지만 더 이상은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듯, 책을 반납하거나 더 이상 읽지 않게 되면 악착같이 뽑아서 통에 집어넣고는 책상 서랍 속에 꽁꽁 감춰버린다.


그녀는 우리를 여러 군데에 꽂아놓았다. 빌린 소설, 충동구매로 샀지만 몇 년째 펴보지 않은 책들, 헐값에 주고 산 누렇게 바랜 구판 성문종합영어, 연간지와 계간지, 다독을 다짐하며 야심 차게 구입한 여러 장르의 책들. 어떤 녀석은 통 밖을 나갔다가 금세 돌아오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어느 날 사라져서 감감무소식이라 실종됐다고 생각할 무렵 기진맥진한 채 돌아왔다.


- 참 나. 육 년 전에 읽기 시작했던 소설이라는데. 나도 거기 이 년 동안 붙잡혀 있었어. 그런데 결국 내용이 기억이 안 난다면서 날 도중에 뽑아내서 그냥 왔지 뭐야. 이제 안 읽겠다는 건지. 나보다 늦게 나온 '요트3호'는 주간지에 꽂혀 있다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로 옮겼는데, 글쎄 그대로 도서관으로 갈 뻔했다지 뭐야. 필사적으로 뛰어올라서 손가락을 찔러가지고 그녀가 겨우 발견해서 지금은 웬 주식 책에 꽂혀 있다네. 또 한 일 년 동안 못 나오는 거 아니야?


녀석들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그녀가 무슨 책을 얼마큼 읽었는지, 어느 정도만에 읽었는지, 다 읽었는지, 덜 읽었는지, 읽다가 덮었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영어 연간지에 꽂혀 있던 녀석은, 그녀가 늘 새해 다짐으로 그 연간지를 사는데 3년 연속 완독에 실패했다고 했다. 어떤 녀석은 그녀가 십오 년 넘게 지니고 있던, 성경책 다음으로 많이 봤다는 묵상집에 꽂혀 있었는데, 늘 꿀단지처럼 품고 다니며 알록달록하게 줄을 쳐가며 소중히 읽다가 어느 날 울분에 가득 차서 그 책을 있는 힘껏 벽으로 집어던졌다고 한다. 지금은 화가 가라앉았는지 다시 손이 제일 많이 가는 가까운 책장에 꽂혀있는 모양이지만, 그때 어찌나 놀랐던지 지금도 그녀의 손이 다가오면 심장이 벌렁거린다고 한다.


나는 통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그러다 드디어 나도 선택을 받아서 지금은 중학교 영어 문법 문제집에 꽂혀 있다. 그녀는 중학교 2학년과 3학년, 그리고 고등학교 문법책을 사놓았다. 별안간 왜 문법 문제집을 푼다고 야단일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매번 똑같은 문법을 가르치며 따분한 하루하루를 보내니 인생이든 커리어든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은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해보려는 게 아닐까 싶다.


이렇게 그녀는 여러 가지 책에 여러 개의 책갈피를 꽂으며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 책을 읽다가 저 책을 읽다가 또 흥미로운 책이 생기면 그쪽으로 눈을 돌리는 그녀는 어떤 때는 한 번에 다섯 권이 넘는 책을 읽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책을 감당하지 못하여 이내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완독 하지 못한 책들을 체념하고, 잃어버린 책갈피를 체념한다. 저렇게 근성이 부족할 수가 있나.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같은 자리에 꽂아둔 채 조금씩 먼지가 쌓여가는 책들. 공부하고 싶고, 탐험하고 싶던 미지의 세계들. 그러나 좀처럼 이어나가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 꽂혀 있을 뿐이다. 출근 준비를 하며, 늦게까지 일을 하며, 잔뜩 피곤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오며,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력감으로 멍하니 빈둥거리며 읽다 만 책들을 힐끔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왠지 쓸쓸해 보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녀의 열정은 언제부터 자꾸만 고갈되어 반짝 타올랐다 사그라들어 버리는 것일까? 사실은 읽고 싶었던 책이란 게 좀처럼 없었던 것이 아닐까? 설레는 이야기에 마음이 끌려 다가가지만, 결국 실망하여 덮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녀의 열정과 설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 주인 그대여.

어렸던 날 그대의 책꽂이를 기억하고 있는가?

그때 그대는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어 눈을 감고도 대사를 줄줄 읊어대곤 했었다. 내가 어떻게 알았느냐고? 구석 자리의 먼지를 뒤집어쓴 나이 든 어느 책이 말해주었다. 그때 그대는 새로운 책이 없어도 조바심 내지 않았고, 헌 책으로도 그대의 세계를 넓혀 가며 꿈을 꾸고 웃었다.


책을 몇 권 읽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지난날의 아쉬움과 조바심을 내려놓고 남은 페이지들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처음 펼쳤을 때처럼 신나고 두근대는 페이지로만 채워진 책은 없다. 넘길수록 지루하며 첫 결의를 앗아가는 힘든 고비들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때 또 다른 책을 찾아서 남아 있는 페이지들을 버려두고 떠나버린다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보람과 희열은 평생 맛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등대1호. 그대가 꽂아 넣은 페이지에서 은색 빛을 쏘며 그대가 무사히 다음 페이지를 넘기길 기다리고 있다. 달빛이 그대의 꿈결로 우리의 속삭임을 흘려보내줄까? 그대가 꿈속에서 내 등대의 불빛을 발견하게 되기를. 내가 밝히는 빛에 의지하여 그대가 한 장, 한 장 바랜 페이지들을 넘기며 마침내 마지막에 다다를 수 있기를. 햇살이 밝은 날이 아니어도, 향긋한 커피가 없어도,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어린 날의 그 환희가 그대 삶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다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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