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입김과 포커페이스

#8. 구년묵이 겨울 코트

by JEMMA

초록불이다. 오들오들 떨며 횡단보도 앞에 서 있던 그녀가 겨울 칼바람에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또각또각 길을 건넌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코트 자락이 나부끼며 안에 입은 원피스가 드러난다. 검정 카라에 단추가 단 세 개뿐인 겨울 코트는 뒷자락은 트여 있어 성큼성큼 걸을 때나 바람이 불 때면 사방으로 펄럭거린다. 검은색 천으로 지어졌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쥐색과 회색실로 만든 점이 미세하게 빗살무늬를 만들며 수직선을 이루고 있기에 완전히 검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녀는 늘 이 코트를 입으면 위에 얇은 검은색 가죽 벨트를 둘러서, 꼭 두꺼운 원피스를 입은 것처럼 보인다.


바람에 휘날리는 긴 생머리. 입술 중간을 쿡 찍어 가장자리까지 톡톡 두드리며 그러데이션을 준 빨간 립스틱.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거나 소매 자락이 들어 올려질 때 슬쩍 보이는 은색 액세서리. 파리지앵 노트 방식으로 두른 검은색과 톤다운 핑크색의 체크무늬 머플러.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상체가 꽉 끼고 치마폭은 넓은 검은색 목폴라 플레어 원피스. 두툼한 굽이 박힌 검은색 니트삭스 앵클부츠. 시크하게 보이려고 신경 쓴 듯 안 쓴 듯 고심한 차림새.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겨울 패션이다.


신호등을 건넌 그녀는 빠르게 걷는다. 하아, 하고 숨을 내쉬자 하얀 김이 허공에 솟아났다 빠르게 사라진다. 앙상한 가로수. 사방에 비닐을 둘러친 푸드 트럭. 마이크를 대고 뭐라 뭐라 소리치는 무리. 그녀만큼이나 무심하게 거리를 지나치는 행인들. 시선은 마른 나뭇가지에서 고층 건물의 차가운 실루엣으로, 건물 꼭대기에서 퍼렇게 질린 회색 하늘로 옮겨간다. 하아, 다시 내뿜는 하얀 김이 사라지는 그 지점에는 귀퉁이가 부스러진 하얀 달이 떠 있다. 눈동자는 가만히 낮달을 응시하다 이내 다시 내려와 거리로 향한다.


사교적인 환한 웃음과 하이톤의 스몰 토크. 그녀는 사람들과 어우러져 이런저런 농담을 던지고, 점잔 빼며 커피를 마신다. 계단을 올라갈 때는 맵시 있게 보이려고 긴 코트 자락을 슬쩍 들어 올렸다가 일부러 펄럭거리게 만들면서 놓는다. 사람들은 가끔씩 코트에 대해 한 마디씩 한다. 어디서 난 코트냐, 잘 어울린다, 키가 더 커 보인다, 멋지다. 글쎄. 그런 말들은 진심으로 칭찬하는 것일 수도, 비아냥거리는 것일 수도, 아니면 그저 인사치레일 수도 있다. 알쏭달쏭한 말들에 그녀는 늘 웃으며 '예전부터 있던 거예요'라고 대답한다.


눈썰미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벗어 놓은 코트 안감에 붙어 있는 낡고 색이 바랜 브랜드 마크와 금색 체인. 얼핏 보면 반짝거리지만 더 이상 초침이 움직이지 않는 손목시계. 처음에는 드라이를 맡기거나 울샴푸로 정성 들여 조물조물 빨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냥 세탁기에 넣고 돌려버려 표면이 거칠어진 머플러. 보풀이 너무 많이 생겨 입을 때마다 급한 대로 몇 개만 대충 떼어내고 입어서 자세히 살펴보면 군데군데 보풀이 붙어 있는 원피스. 한창 유행할 때는 돈이 없어서 사지 못했으나 시간이 흘러 그 마음을 보상하고자 그때 갖고 싶던 그 디자인을 찾아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서 구매한, 유행 지난 니트삭스 앵클부츠.


혹여나 누군가의 예리함이 이 모든 구질구질함을 알아차릴까 불안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포커페이스다. 들키든지 말든지 이것만 지키면 명예를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옷차림 때문에 전전긍긍할 에너지는 없다. 개살구 같은 패션의 실체를 들킬까 봐서가 아니라 개살구 같은 패션의 실체를 들켰을 때 포커페이스가 무너져 내릴까 봐 모든 신경을 기울이다 보면, 생기란 생기는 다 빠져나가 돌아가는 길에 유령처럼 흐느적거리게 된다.


하아.

흐느적거리는 기다란 검은 코트가 이제는 밤달이 되어 까만 하늘 한 구석에서 빛나고 있는 뭉개진 동그라미 위로 하얀 연기를 내뿜는다. 시야에 가득 뿌려졌다 흩어지는 하얀 김은 이 몸이 유령이 아니라 생령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낡은 코트에 감싸인 구년묵이 생령. 그러나 그녀여, 포커페이스를 잃지 마라. 아무튼 나는 왕년에 패셔너블한 코트였고, 예나 지금이나 섣불리 입을 만한 코트는 아니므로. 하얀 숨을 내쉬며, 펄럭거리며, 우리는 위엄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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