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왕초보 노란 딱지 구형 세단
세월은 고요하고 빠른 물결같이 흘러갔다. 별다른 시련도 사건도 없이 무난한 삶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감탄했다. 그때 나는 나름대로 대단한 차였다. 나를 구매한 첫 주인은 나를 금이야 옥이야 소중하게 관리했고, 나는 평탄한 여생을 마치고 무사히 중고차 매장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쯤 세상은 많이 변해서, 나보다 쟁쟁한 차들이 수도 없이 많아졌다. 나는 구닥다리에다가 가성비가 좋지 않다며 뒤로 밀려났고 나를 선택하는 사람은 없었다. 중고차 딜러는 나를 정성껏 치장해서 온라인 사이트에 열심히 광고를 했지만 꽤 오랫동안 팔리지 않아서, 어느새 나는 그 매장에서 제일 저렴한 차가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겨울에 두 번째 주인을 만났다. 차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내 주인은 지인에게 의지해서 나를 여기저기 살펴보고는 나를 사겠다고 했다. 아마도 저렴한 가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에게 올라타서 약간 두려운 눈빛으로 이것저것 조작해 보는 그녀를 보니 과연 나를 제대로 타고 다닐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운전 연수를 조금 받고 난 후에도 여전히 무서워하는 것 같았지만, 딱히 옆에 타서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에 어느 날 혼자 차를 몰고 나갔다가 앞차를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나는 오른쪽 범퍼가 다 찌그러졌고 라이트가 박살이 난 채 부들부들 떨었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사고라 어찌나 놀랐던지 엔진이 터지는 줄 알았다. 평온한 청춘을 보내고 다 늙어서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그녀는 다시는 운전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나를 힐끔 보더니 마음을 다잡는 듯했다. 다시 운전 연수를 받고 이후 그럭저럭 동네를 잘 끌고 다니고 있다.
그녀는 겁이 많기도 하고 요즘 별로 다닐 데가 없기도 하여 주말에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 말고는 거의 운전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한자리에 며칠 동안 그대로 있느라 송진 세례를 받기도 하고, 낙엽이 잔뜩 쌓인 채 방치되어 있을 때도 있다. 그녀는 내게 '블랙 민트'라는 이름을 붙여주고는 생뚱맞게 내 검은 몸 뒤에 '왕초보'라고 적힌 대문짝만 한 샛노란 글자 스티커를 붙여놓았다. 아마 동네 사람들은 이제 내가 누군지 알아볼 것이다. 그녀의 지인은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창 밖으로 나를 보고는 그녀에게 '노란색 왕초보, 그거 네 차지?' 하고 물었다. 이쯤 되면 내 이름은 '블랙 옐로우'가 되어야 맞지 않나. 이 나이 먹고 노란 명찰이라니. 창피하지만 그게 그렇게 위안이 된다니 어쩔 수 없다.
나를 보면 언제나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는 그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차를 몰고 다닐 환경, 주차할 공간 등을 생각하다 보면 지금 사는 곳과 지금 하는 일, 지금 사는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아 우울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래도 삶 전체를 뜯어고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왜 내 거주지에는 주차장이 없을까. 왜 내 직장엔 차를 댈 곳이 없을까. 왜 나는 운전에 익숙해질 때까지 옆에 타고 다녀줄 사람이 없을까. 왜 나는 아직까지 붐비는 도로나 야간 운전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쫄보인 걸까. 그녀는 늘 그렇게 생각하며 불평하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자기 삶에는 고난이든 행운이든 별다르게 특별하다고 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라고 다 갖춰진 조건 속에서 도전을 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교통사고 때문에 보험료가 올라간 그녀는 부들부들 손을 떨며 값비싼 보험료를 결제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연말에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새 노트북은 당분간 사지 못할 테지. 내가 애물단지가 된 것만 같아 불편한 마음이 든다. 며칠 동안 홀로 남겨져 나뭇잎을 맞으며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렸다. 혹시 나를 산 것을 후회하는 것일까? 그녀가 친구와 통화하며 '다시 팔아버릴 수도 없고...' 하며 한숨을 쉬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정말로 나를 팔아버린다면, 나는 이제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손에는 언제 샀는지 차량용 청소기가 들려 있다.
조그마한 청소기로 열심히 틈새에 낀 나뭇잎과 씨앗들을 날리고, 빨아들인다. 어느 날은 겨우 7분 거리에 있는 곳에 손세차를 맡기겠다며 내비게이션 모의주행을 열 번 정도 들여다보고는 '제발 골목길 맞은편에서 차가 안 오게 해 주세요!' 하고 통성기도를 하며 온갖 호들갑을 다 떨고 나서야 겨우 출발한다. 어느 날은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그대로 과속방지턱을 넘어 내가 삐걱삐걱 비명을 지르면 '으악! 죄송해요, 죄송해요, 할아버지...' 하며 사과를 한다. 어느 날은 선물 받은 꽃향기가 나는 방향제를 낑낑대며 딸깍딸깍 대다가 겨우 설치를 끝내고는 냄새가 좋아졌다며 흐뭇해한다.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점차 안심이 된다. 그녀는 나를 팔아버릴 생각이 없다.
주유소에 들어가기가 무섭다고 계속 미루다가 기름이 다 떨어져 긴급 출동을 부르기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들어가 주유구 반대쪽에 나를 세운 날. 이 주일 동안이나 고민하고 일주일 내내 시름시름 대며 걱정을 하다가 겨우 손세차를 맡기러 간 날. 주차할 곳이 없어 패닉 상태로 처음으로 동네를 다섯 바퀴나 뱅글뱅글 돌며 눈물을 흘린 날. 외곽 지역 카페에 가다가 로드킬 당한 산짐승을 밟고 지나가며 공포에 질려 괴성을 지른 날(지금 생각해도 타이어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조수석에 사람을 태우고 첫 야간 운전을 나섰다가 좌회전할 때 옆 차선의 어느 정신 나간 양반이 핸드폰을 보며 핸들을 꺾다 나를 들이받으려고 하는 걸 피하느라 처음으로 역주행을 하고는 뒤늦게 정신이 돌아와 이미 떠나버려 아무도 없는 도로에 욕설을 퍼붓던 날. 우리의 추억은 이렇게 조금씩 쌓여가고 있다.
내 주인아.
늦어버린 시작. 늦어버린 유턴. 남들은 이미 첫 차를 팔아버리고 새로운 차를 뽑곤 하는 늦어버린 어느 날에 우리는 처음 만났다. 그러나 그대의 늦음이 단조롭던 나의 노년에 새 삶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늙은 나는 이제야 비로소 시작되는 그대의 모든 순간이 싱그럽다. 앞서가는 저들은 그냥 가게 두어라. 남들의 시간은 신경 쓰지 말고 함께 달리자. 내가 결국 폐차장의 고철로 돌아가는 날에는, 그대가 새 차를 맞이하는 날에는, 서툴렀던 이 모든 시간들이 우리만의 추억으로 간직되어 그대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