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의 편지

#5. n 년 된 다이어리

by JEMMA

그대,

흘러가는 세월을 어찌 보내고 있나요?

햇살을 받으면 하얗게 빛날 나의 속살은 어둠 속에 포개어져,

마치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한밤중의 눈밭처럼 순결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눈밭의 발자국은 오래전에 멎었고,

그대의 어루만짐은 먼 옛날 전설같이 느껴지네요.

이 끝없는 고요한 밤에,

나는 그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해를 시작하며 어느 서점에서 어느 다이어리를 고르던

그대의 마음을 나는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여느 해처럼 그저 송구영신의 무한굴레 속에서 그다음 다이어리를 고르는 것일 뿐이었으니까요.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나를 고른 건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었지만,

의아한 마음은 살짝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표지도 속지도 온통 새하얀 백지로 되어 있었는데,

눈에 띄는 유일한 점은 희미한 은색 반짝이가 박혀 있는 pvc 커버를 입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선과 칸도 없는 데다 연도도 적혀있지 않은데 가격은 꽤나 비싸서 팔리지 않고 구석에 밀려나 있었던 나를 그대가 덥석 집어 들었었지요.


그대는 내가 백지인 것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자도 대지 않고 그저 펜 하나로 슥슥 스스로 선을 그려 달력을 만들고 숫자를 써넣었습니다.

그리고 자질구레한 일상을 채워 넣었고, 어떤 날은 끄적끄적 그날의 기분이나 부질없는 말들을 써 내려가기도 했었지요.


그렇게 내 하얀 종이에 그대의 반짝이는 삶의 조각을 조금 떼어 가두어놓던

그 장난스러운 눈동자를 보면 나 역시 흐뭇해지곤 했었답니다.

한 장 한 장 채워지는 그대의 투박한 글씨체는 단단한 결의와 다짐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대의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소중하게 보관해 주어야지.

이렇게 생각하며 벅차오르곤 했지요.

여느 다른 다이어리처럼 그대의 열두 달을 온전히 새겨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나를 반도 채우지 못한 채 사라졌고,

그렇게 그 해는 끝이 나버렸습니다.

완성되지 못한 나를 버려두고 또 송구영신을 맞이하러 가버린 것이겠지.

마음이 아파 울곤 했지요.


그래서 어느 날 그대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를 펼쳐 들었을 때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생기가 사라진 그대의 눈빛에서 송구영신의 활기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아! 하고 소리를 치고 싶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대는 이따금씩 나를 펼쳐서 마치 징검다리를 놓듯 삶의 뭉텅이를 띄엄띄엄 얹어놓고 사라졌습니다.

어떤 때는 그대 특유의 삐뚤빼뚤한 달력을 그리더니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버린 미래의 날짜를 적어놓고 가버렸고, 어떤 때는 깨알 같은 일기를 빼곡히 적어놓고는 사라져 버려 한참 동안 나타나지 않았더랬죠.


조각조각난 그대의 시간에서 그대의 좌절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나는 그대의 마음을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그저 하얗기만 한 무(無)와 같은 나를 고른 이유는

삶의 풍파에 닳아가는 마음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싶었던 그대의 간절한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아무 무늬도 없는 나의 공허함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렇기에 나를 골랐던 것이었습니다.

부질없이 찢겨 날아가버린 그대의 세월 조각들을 주워 모으고 싶었던 그대의 마음을 나는 왜 이제야 알았을까요.


이제 그 띄엄띄엄한 방문도 희미해져 갑니다.

나의 남은 속지는 이대로 영원히 하얀 공백으로 남게 될까요?

그대가 다시 시간의 조각을 들고 내게 찾아오길 바랍니다.

그 조각들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아무래도 좋아요.

내가 그대의 찢어진 시간들로 모자이크를 만들어 줄게요.

완성되고 나면 내 커버의 반짝이를 모두 떼어 뿌려줄게요.


그대,

흘러가는 세월을 어찌 보내고 있나요?

그대가 설레어하고, 탄성을 지르고, 그러다 실망을 하고,

내 하얀 몸에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하였던 그러한 순간들에

그대의 분신과도 같았던 나는

이제는 그대의 시간을 도무지 알지 못하여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그대의 마지막 다이어리인 나는,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전 05화실버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