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라이프

#4. 은팔찌와 은반지

by JEMMA

덜그럭 덜그럭.


대문을 나서다 몇 발자국 걸어갔다 되돌아온 그녀가 액세서리 함을 분주하게 헤집는다.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느라 우릴 까먹고 그냥 나갔다 되돌아온 모양이다. 과하지 않게 울퉁불퉁한 패턴의 은반지와 민무늬 뱅글 은팔찌. 그녀는 우리를 '문신템'이라고 부르며 외출할 때마다 오른손 엄지와 오른쪽 손목에 끼고 다닌다. 곧 순금이나 비싼 보석이 박힌 것들로 바꿀 거라며 허세를 부려 우릴 시무룩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돈이 없는 건지 그냥 허풍이었는지 그녀의 손가락과 팔은 여전히 우리 차지다.


인생 대실패를 맛보며 오랜 칩거 생활을 끝낸 그녀는 멈춘 인생을 다시 작동시켰다. 그러나 이내 여기서도 저기서도 애매한 위치에 서 있다며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어떤 직장을 그만두며 또다시 기진맥진해진 그녀는 퇴사 후 생각지도 못한 연차수당이 입금되자 그 돈으로 우리를 샀다. 어느 주얼리샵에서 사고 싶었던 액세서리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지만, 다 떨어진 재산을 다시 채워나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다지 여유가 없었던 그녀는 아쉬운 대로 십 몇만 원에 팔리고 있던 우리를 구입한 것이다. 우리의 만남은 그녀가 자신의 씁쓸한 새 출발을 최대한의 사치로 격려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우릴 처음 보았을 때 그녀의 눈빛을 보고 그걸 알았다. 맥 빠진 듯 설레는 듯 애매하게 반짝이는 그 눈빛. 그러나 나쁘지 않았다. 아무튼 그것은 애정 어린 눈빛의 일종이었으니까.


계절이 지나면 금세 질려하며 다른 액세서리를 찾곤 하는 그녀는 자주자주 바꿀 수 있어야 한다며 크게 비싼 장신구는 사지 않았다. 애지중지 예쁨을 받다가도 순식간에 찬밥 신세가 되어버려 보석함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처량한 이들은 오늘은 나갈 수 있으려나, 목을 쭉 빼고 짤랑거린다. 그녀가 외출할 때마다 우리를 꺼내는 모습을 보며 부러운 눈길을 보낸다. 왠지 모르게 에헴, 힘이 들어가면서도 언젠가 그녀가 정말로 갖고 싶던 그 보석을 사게 되면 우리도 저런 신세가 될 거란 생각에 불편해진다.


이런 목걸이 저런 귀걸이에 고개가 돌아가는 것처럼, 그녀는 인생에 놓여있던 수많은 선택지들을 입맛을 다시며 둘러본다. 가지고 싶은 비싼 보석을 사지 못하듯 포기해 버린 꿈들을 아쉬워한다. 대신 단돈 몇만 원에 살 수 있는 팔찌를 사듯 적당히 타협하여 얻은 것들로 즐거움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한 타협은 죄책감이 되어 또 그녀를 괴롭힌다. 문신처럼 늘 달라붙어 따라다니는 우리를 보는 그녀의 눈빛은 오묘하다. 습관처럼 엄지의 은반지를 마디까지 끌어올렸다가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가 하며 패턴을 어루만진다.


우리는 그녀에게 그리 나쁘지 않은 패셔너블함을 선사한다. 그녀가 따분한 정장을 차려입고 점잔 빼며 앉아 있을 때, 마치 안 보이는 곳에 숨겨놨는데 제멋대로 튀어나온 금쪽이처럼 헐렁한 재킷 소매 사이로 쭉 삐져나와 손목과 엄지손가락에서 하얗게 번쩍거린다. 쉬는 날 집에서 입고 있던 조거 팬츠와 예전에 어떤 행사에서 맞춘 단체티 차림 그대로 산책을 가거나 카페에 갈 때에도 우리 덕분에 그나마 '패션 테러리스트'와 '패피'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다크서클이 잔뜩 낀 눈두덩이를 파르르 떨며 스타벅스에서 뜨끈뜨끈한 '오늘의 커피'를 들이켤 때에도 그 몰골이 사약받는 죄인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다 우리 덕분이다. 그녀는 이런 이단아 같은 패션을 꽤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순간순간 우리를 쓸어내리고 어루만지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비싸지도 싸지도 않아서 좋아.'


그녀는 이 말을 누구에게 하는 걸까? 동도 아니고 금도 아닌 은으로 만들어진 우리에게서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발견하는 것일까? 정말로 좋아하는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화를 내거나 슬퍼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표정으로는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다. 하지만 과분한 자리에도 별 볼일 없는 자리에도 늘 우리를 데려가는 그녀는 왠지 결연한 표정이다. '은'의 삶을 받아들이겠다, 나는 '은'이다, 뭐 그런 표정이다.


달빛에 살아나 물건이 말을 한다는 동화 같은 얘기가 있다고 들어보았지만, 나도 아직 그런 물건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만약 내게 그런 밤이 온다면 곤히 잠든 내 주인 그대에게 속삭이고 싶다. 기억해라. 지난날을 기억해라. 그때 그 실오라기 같은 순금 팔찌를 사지 못해 분했던 마음과, 수많은 길거리를 방황하며 온갖 자질구레한 액세서리를 사고, 버리고, 또 사고, 또 우르르 내버렸던 나날들을, 마침내 적당한 은팔찌와 은반지를 손에 차고서 이 길로 들어서던 그 결연한 마음을. 그대의 따분하고 보잘것없는 일상을 우리가 온 힘을 다해 패셔너블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을, 부디 기억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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