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젠타와 스칼렛

#9. 싼 그리고 비싼 립앤치크밤

by JEMMA

#. 마젠타 이야기


안녕? 난 마젠타야. 오늘 외출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글쎄 내 주인이 또 나를 쏙 빼놓고 쿠션이랑 립스틱이랑 거울만 데리고 나가버렸지 뭐야. 오늘 가방에 가면 곰돌이 키링에게 길거리에서 본 것들을 얘기해 달라고 하려 했는데. 진짜 분해. 난 또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네. 이럴 거면 그냥 파우치에 넣어주던가. 스칼렛과 수다나 떨게. 그러고 보면 예전엔 파우치를 통째로 들고 다녔었는데. 그러면 우리는 가방 안에서 덜그럭거리며 소풍 가듯 들떠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슬쩍슬쩍 바깥 구경도 할 수 있었지. 스칼렛! 아, 안 들리나 봐. 파우치 안에서 잠이 든 게 분명해. 요즘 계속 꾸벅꾸벅 졸고 있거든. 하긴 나갈 일이 별로 없으니 그럴 만도 해.


스칼렛과 나는 납작하고 동그란 통에 담긴 붉은색 립앤치크밤이야. 볼과 입술에 생기를 주기 위해 소량을 찍어 바르지. 내가 처음 파우치에 들어왔을 때, 스칼렛은 이미 있었고 절반 정도 사용된 채였어. 스칼렛은 나보다 가격이 스무 배가 넘는 고귀한 명품 브랜드 출신이야. 스칼렛은 나를 보더니 '하! 나를 다 쓰지도 않고 이런 꼬맹이를 또 데리고 왔네?' 하며 코웃음을 쳤어. 나는 처음에는 놀랐지만, 스칼렛은 약간 도도할 뿐 내게 잘 대해줘서 안심이 되었고 우린 잘 지내는 중이야.


내가 온 후 그녀는 늘 나만 찾았어. 삼천 원 밖에 하지 않는 나를 처음에 톡톡 발라보더니 생각보다 너무 좋다며 만족스러워해서 뿌듯했어.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저렴하지만 아주 부드러워서 그녀의 피부에 아주 찰떡같이 달라붙고 은은한 향기도 나거든. 약간 보랏빛이 감도는 붉은 색깔도 의외로 그녀의 혈색과 아주 잘 어울려서 그녀는 출근할 때나 약속 만남에 나갈 때, 혼자 커피를 마시러 갈 때 나를 데려가기 시작했어.


스칼렛이 뚱한 얼굴로 맨날 그녀의 손에 들려 나가는 날 보는 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돌아올 때면 내가 본 것들을 스칼렛에게 열심히 얘기해 주었어. 그러면 스칼렛도 귀 기울이며 잘 들어주고 또 자기가 본 것도 얘기해 주곤 해. 스칼렛은 멋진 장소와 좋은 식당들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서 얘기를 들으면 황홀해지고 군침이 돌아. 나도 그런 곳들에 가 보았으면!


그녀는 씻고 얼굴에 스킨, 에센스, 크림, 선크림을 바른 후에 쿠션으로 대충 얼굴을 팡팡 두드리고 나서 나를 조금 바르는 것으로 메이크업을 마무리해. 보통 때는 광대뼈 부분과 입술에만 바르지만 때때로 눈두덩이와 눈 밑에 살짝 찍어 바를 때도 있어. 스칼렛 말로는 예전에 파우치 안에는 아이섀도, 마스카라, 아이브로우, 아이라이너, 하이라이터, 쉐딩 스틱, 피니쉬파우더, 미스트 등 여러 화장품들이 많았다고 해. 마스카라는 검은색과 갈색 두 종류나 있고 아이브로우는 펜슬, 팔레트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는 거야. 난 믿을 수가 없어. 정말 그녀가 예전에 그 모든 것들을 발랐단 말이야?


단지 내 붉은빛을 뺨에 얹어 약간의 생기를 주는 것 외에 딱히 메이크업이라고 할 만한 건 없는데도, 요즘 들어 그녀는 기어이 그 과정을 줄이고자 나마저 빼버리려는 거야. 피부가 별로 좋지 않은 것이 콤플렉스라 스트레스도 받고 신경도 많이 썼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다 내려놓은 모양이야. 어느 날은 글쎄 선크림만 바르고 그냥 나가려는 거야. 세상에! 화들짝 놀라서 또르르 굴러서 그녀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더니 귀찮은 듯이 나를 파우치 안에 던져 넣어버리는 거 있지. 너무 분해서 파르르 떠는데 스칼렛이 나를 톡톡 치며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어. 그녀가 쌩얼바람으로 나가버리는 데도, 스칼렛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더라.


약간의 붉은빛조차 생략하려는 그녀의 메이크업처럼, 그녀의 삶에선 자꾸만 여러 가지가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있는 것 같아.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던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머리가 너무 아프다며, 쉬고 싶다며 하나씩 놔버리고 주말 오후에 외출도 하지 않고 그저 햇살을 쬐며 멍하니 앉아 있곤 해. 난 아쉬워. 그녀가 좀 더 힘을 낼 순 없는 걸까?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의 메이크업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거야. 풀메이크업을 할 수 없다면 나라도 찍어 발랐으면 하는 거야. 나는 그녀 얼굴의 생기가 되고 싶어. 그리하여 그녀의 일상에도 붉은 생기가 돌게 하고 싶어. 그녀가 나를 묻혀 얼굴에 혈색을 만들어내듯, 칙칙한 일상에 작은 설렘들을 톡톡 두드려 화사한 색을 더할 수 있기를!



#. 스칼렛 이야기


말이 많구나, 마젠타. 늘 재잘재잘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며 색종이 같은 유치한 향기를 풍기지. 하긴 그런 면 때문에 그녀가 그 애를 자꾸만 찾는 거겠지. 품위는 없지만 활달하고 천진난만한 자주색 뺨. 마젠타의 색깔이 희한하게도 그녀에게 찰떡 같이 어울린다는 건 인정한다. 강렬하게 붉지만 보랏빛이 섞여 오묘함을 자아내고, 어린 시절 싸구려 향수에 들어 있던 색종이 향을 풍기면서도 톤다운된 자주색은 왠지 모를 암울함을 풍기곤 해. 그 어둡고 붉은 색조는 대담하고 발칙하여 소녀 같은 혈색을 주면서도 차가운 느낌을 주는데, 그 인상은 천진난만함을 가리우며 다시 그녀를 나이 든 여자처럼 보이게 하지. 그녀도 그런 점 때문에 마젠타에게 끌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젠타를 자주 찾는 그녀는 결혼식이나 다른 모임들에 갈 때에야 비로소 나를 데려간다. 나는 마젠타와 같은 강렬한 색깔과 유치한 추억의 향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고상하고 클래식한 선홍색으로 그녀의 뺨에 과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홍조를 만들어낸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차려야 하기에 이런 자리에는 억지로 만들어낸 붉은색은 지양한다. 게다가 무심결에 화장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때는 내 가문의 문장이 박힌 케이스가 필요한 것이다. 그녀 나이쯤 되면 나를 들고 있어야 오히려 눈에 띄지 않게 타인과 녹아들 수 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소녀스러움은 불필요한 주의를 끌어 피곤해질 뿐이다.


내 주인아. 그대가 나를 많이 찾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좋다. 나는 스쳐 지나간 많은 화장품들을 보았다. 그대의 눈두덩이에 얹힌 아이섀도는 세 가지 색에서 두 가지로, 다시 한 가지로 줄어들었고, 기분 따라 때에 따라 골라 사용하던 여러 마스카라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그대가 갖가지 화장품들을 떠나보낸 건 단지 귀찮음과 무기력 때문만이 아니라 세월과 바꾸어 얻어낸 진짜 얼굴을 마주할 용기와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다만 그대가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비통함을 마주하며 창백하여질 때에는, 나와 마젠타를 기억해 주기를. 우리는 그대의 뺨과 입술만이 아니라 그대의 마음까지도 붉은 생기를 덧칠하여, 마침내 그대가 다시 일어나 '영원한 청춘'이라는 그 원대한 꿈으로 달려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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