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모이는 곳에는

#10. 플라스틱 앞머리 집게핀

by JEMMA

이른 귀가를 한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생각에 잠긴 듯 방을 맴돈다. 다시 나갈 것인가, 오늘 하루는 여기서 마무리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여러 선택지를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열심히 스케줄을 짜보던 그녀는 이내 뱅글뱅글 돌던 걸음을 딱 멈추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오, 그냥 집에 남아있기로 한 것이다. 피곤한 눈에서 콘택트렌즈를 빼고 집에서만 쓰는 안경을 귓가에 걸치고 나면, 이제 나를 찾을 시간이 다 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길쭉하고 아무 무늬도 장식도 없는 검은색 플라스틱 집게핀이다. 그녀가 나를 언제 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오래전에 저렴한 물건을 파는 가게에서 이것저것을 고르다가 나도 함께 주워 담겨 그녀의 집으로 왔다. 그녀는 머리핀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아주 가끔씩 충동구매로 산 몇 개가 서랍 구석에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자주 쓰는 머리핀은 그중 옅은 분홍색의 올림머리용 플라스틱 대형 집게핀, 그리고 나다. 그녀는 오직 집에 머무를 때에만 우리를 착용한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긴 머리가 성가시지 않도록 머리카락을 머리 꼭대기에서 양옆으로 왔다 갔다 쌓아서 커다란 집게핀을 정면에서 봤을 때 가로로 보이게 쿡 집어서 고정시키고는 앞머리를 싹싹 쓸어 뒤로 넘긴 다음 나를 집어서 꼼짝 못 하게 눌러놓는다. 이 괴이한 모습은 마치 중국 청나라 사극에 나오는 여자들의 머리 장식 같기도 하고 귀를 쫑긋 세운 캥거루 같기도 하다. 이런 몰골로 집 앞 편의점을 가거나 배달 음식을 받으러 나가면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눈동자가 흔들리기 때문에 일단 이 돌이킬 수 없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나면 꼼짝없이 집콕 확정이다.


만주벌판 같은 이마는 또 어떻고. 평소 집 밖에 나갈 때는 절대 이마를 까지 않는데,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피부관리실에 들렀다가 바로 출근하는 바람에 망가진 앞머리를 머리띠로 까고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학생이 참다못해 손을 들고 '선생님, 죄송하지만 앞머리를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물었다는 슬픈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넓은 이마는 나이가 들며 더욱 넓어졌으면 넓어졌지 이제 좁아질 일은 없다. 부담스러운 이마는 반드시 가려야 한다. 악착같이 앞머리를 고수하며 지쳐 구겨져가는 이마와 미간을 감춘다. 집에 돌아오면 피곤한 이마는 땀과 기름기 때문에 번들거리고, 어서 이 쇠창살 같은 앞머리에서 해방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 나의 쓸모가 발휘된다. 내가 할 일은 이마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아무리 넓게 까졌다고 한들 이제 놀라는 사람도 꼭 한 마디씩 하는 사람도 없다.


나를 이마 위에 꽂아 넣은 바로 뒤쪽에는 큰 집게핀이 거추장스러운 긴 머리카락을 둘둘 감아 정수리 위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갑자기 이불 위에 벌렁 누워버려거치적거리지 않는다. 그녀는 편안하게 자리 잡고 핸드폰 알림을 진동에서 무음으로 바꾼다. 이 순간부터 나갈 의사가 없으며 세상과 단절된다는 뜻이다.


언제부터였나. 머리 위에 나를 꽂을 때 시무룩하던 표정이 편안해지고, 잔뜩 기가 빨려 동태눈 같아진 눈동자가 안도감에 반짝거리게 되었던 건. 사실은 외로울 때도 있다는 걸 안다. 밤늦게 퇴근하고도 야식 약속이 생기고, 주말엔 두세 달 스케줄이 꽉 차버리곤 했던 예전의 나날들을 가끔 그리워한다는 것을. 추억을 그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렇게 집 안에 틀어박혀 못 나갈 몰골을 하고서 마음의 평안을 누리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대의 앞머리를 꼭 쥐고 민낯을 훤히 드러내 보여준다. 거울에 비친 저 얼굴이 하루하루 더욱더 편안해지기를. 그대여, 오늘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추억이 그대를 괴롭히는 악몽이 아니라 나이 든 밤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잠들게 하는 예쁜 꿈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어느 날 뚝 부러져 버린다 해도 상심하지 말아라. 흘러가는 것들은 모두 여정이 있는 법이다. 추억이 모이는 곳에는 바다가 있다. 그곳에서 즐겁게 파도치며 햇살에 반짝이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함께 추억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웃을 그날에는 나와 모든 무생물이 속삭였던 자장가가 그대 귓가에 들려올 수 있으리.




* 다음 주에 마지막 물건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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