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혀 버린 문이 아니라 지난날의 투지를

#11. 갱지 연습장

by JEMMA

슥슥슥.

귓가에 그때의 소리가 들려온다. 비장한 표정으로 회색 공간에 검은 선을 그어 삼등분한다. 꺼끌꺼끌한 질감에 손목에 힘이 들어가면서도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어 보인다. 처음엔 샤프로 알 수 없는 기호와 토막 난 단어를 휘갈겨 쓰더니 며칠 후에는 바로 그 자리에 검은색 볼펜으로 비슷한 낙서를 재빠르게 휙휙 끄적인다.


그녀는 그때 그런 낙서를 할 날들이 계속 펼쳐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샤프로 쓴 자리를 볼펜으로 덮어쓰며 회색 갱지를 아껴 썼던 것이겠지. 이리도 두툼한데도, 나는 벌써 세 번째 갱지 연습장이다. 그녀는 다섯 묶음의 두꺼운 갱지 연습장을 사놓았는데, 이미 수많은 연습장을 쓰고 난 이후였다. 이번에도 당연히 다 써버릴 거라 생각하며 다섯 개나 한꺼번에 구입했다.


두 개는 그 쓸모를 다하여 처분되었고, 나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나머지 두 권과 함께 아직도 그녀의 책꽂이에 꽂혀 있다. 나는 절반 정도 사용되었는데, 종이 한 장의 한 면은 모두 그 이상한 기호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그 뒷면은 비어 있다. 그녀가 최대한 빨리 휙휙 넘기며 글씨를 써야 해서 이런 모습이 되었다. 그녀는 통역을 하며 나름대로 자기만의 기호를 만들어 놓았다. 휘갈겨 쓴 단어나 단어의 첫 글자 사이사이에 삼각형, 이중 동그라미, 꼬불꼬불한 화살표, 알파벳 대문자 등이 세로로 내려가며 띄엄띄엄 적혀 있는데 지금은 그녀조차 가물가물하여 가끔 들여다보게 되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기호들로 모든 장을 다 채우고 그 뒷장은 대부분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데, 토익 문제의 답, 새해 계획, 짧은 문구, 독학 계획표, 첫 근무날 적은 주의사항, 업무 회의 내용, 학부모 상담 내용 등이 몇 장 적혀 있다가 이내 비어 있다. 중간중간 화난 듯 눈썹이 치켜 올라간 얼굴 그림, 눈물이 맺혀 있는 눈 그림, 손가락 욕 그림, 왠지 열받아 보이는 웃고 있는 고양이 그림, '흥', '짜장나네?', '어쩔TV', '루지하다(지루하다를 거꾸로 쓴 듯하다)', '야식 처방'과 같은 쓸모없는 단어들이 마치 기호처럼 군데군데 적혀 있다. 가끔씩 나타난 벌레를 잡느라 반쯤 찢겨 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책갈피로 쓰느라 한 장씩 뜯어가는 바람에 이미 여러 장이 사라졌다.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지는 꽤 한참이나 되었다. 우리는 이제 애물단지처럼 손이 많이 닿지 않고 잘 보이지도 않는 책장 구석에 꽂혀 있다. 나머지 두 녀석은 새것이기라도 하지. 나는 한쪽 면만 사용된 채 다 쓴 것도 아니고 안 쓴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뭐 어찌해야 하냔 말이다. 왜 이렇게 나를 절반만 사용한 거냐고 따지고 싶다가도 한편으론 아무래도 좋으니까 저 두 녀석 만이라도 쓸모 있게 사용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곤 한다.


내 주인 그대여,

기후 위기, 무역 전쟁, 자동화와 일자리, 암호화폐. 바쁘게 적어 내려간 그 모든 기호들의 뒷면에 무료하게 끄적거린 빡친 고양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나를 펼쳐 보아라. 나는 매끈하고 부드럽고 하얀 고급 종이가 아니다. 내가 이렇게 거칠고 투박한 회색의 갱지였기에 그대는 과감히 기호들을 휘갈길 용기를 내지 아니하였는가? 나의 회색 종이들은 그대가 쓰고 쓰고 또 쓸 때까지 버티어냈다. 그대의 눈물방울들도 감쪽같이 스며들게 해 감춰주었다.


지난 기호들을 보고 슬퍼하지 말아라. 그걸 볼 때에 닫혀버린 문이 아니라 무엇이든 뚫고 나가려 했던 지난날 그대의 투지를 기억하라. 회색 갱지에 적지 못할 것이 없었던 것처럼, 이제 다시 삶에 그대만의 기호를 만들어 보아라. 힘차게 휘갈겨라, 용감하게 페이지를 휙휙 넘겨라!


회색 페이지들이여, 반쪽의 기호들이여.

달빛에 살아나 몸을 흔들어라, 빛나라.

그녀의 꿈으로 달려가자.

그녀의 투지는 깨어나리라.




* 그동안 '무생물 자장가'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주에 에필로그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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