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시가 열두 번이 지나도

#2. 회색 나시 원피스

by JEMMA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십여 년 전 대형마트에서 만 원에 팔리고 있던 나를 그녀가 발견하고 냉큼 집어 들었을 때였다. 나는 상체 부분은 회색 면 나시, 아래는 흰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고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여름용 원피스다. 그녀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장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참 어렸던 그녀는 정수리까지 머리카락을 한껏 끌어올린 포니테일을 하고 눈에는 지금은 꿈도 못 꿀 에메랄드색 아이섀도로 포인트를 주곤 했다. 나를 입고 돌아다니면 그녀의 하얀 팔과 어깨가 햇살에 하얗게 빛났고, 그녀의 피부색은 나 때문에 더 화사해 보였다. 사람들은 그 옷이 참 잘 어울린다며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흡족하게 웃으면서 홈***에서 만 원 주고 샀다며 '잘 샀죠?' 하며 자랑을 했다.


그녀는 나를 입고 온 곳을 돌아다녔다. 일하러 갈 때, 친구를 만날 때, 여름휴가를 갈 때, 심지어 소개팅을 할 때에도 나를 입고 간 적도 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함께 하며 우리는 함께 늙어가 지금에 이르렀다. 언젠가 한번 하마터면 버려질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옷 정리를 하는 동안 실수로 내가 버리려는 옷더미에 섞여 들어갔던 것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그녀는 처분하기 직전에 허겁지겁 비닐봉지를 뒤져 나를 찾아냈고, 그렇게 나는 무사히 구조되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그녀는 이제 불혹을 앞두는 나이가 되었다. 여름마다 그녀의 몸에 걸쳐질 때면 조금씩 차이가 느껴진다. 날렵했던 팔다리는 이제 나잇살 때문에 그냥 드러내놓기는 애매해져서, 그녀는 이제 나를 입고 위에 검은색 반팔 카디건을 걸친다. 높은 포니테일도 풀메이크업도 없다. 그래도 어리면 어린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어찌어찌 코디를 해서 꿋꿋하게 걸치고 다닌다.


무정한 세월과 싸우느라 그때의 생기는 사라지고, 때때로 분노 조절에 실패하는 그녀는 그때보다 훨씬 더 무표정이다. 폴짝폴짝 뛰면서 깔깔거리며 웃기보다는 시니컬한 눈알을 굴리며 입을 살짝 비틀어 썩소를 지을 때가 더 많다. 그때의 감수성은 까맣게 잊었다. 귀차니즘도 심해졌고 예전에 좋아하던 것들도 시큰둥하다. 별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녀의 지난 삶에는 이따금씩 삭제하고 싶은 구간들이 존재한다. 때로 그녀는 과거를 증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나를 계속 입고 다니는 걸까? 예전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지난날의 실수를 후회하고 있을까?


여름마다 나를 집어들 때의 그녀의 눈빛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나를 볼 때면 더 이상 들뜨거나 신나는 표정이 아니다. 씁쓸해 보이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하고,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를 입고 거울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공허해 보인다. 뜯어보지 않은 가능성과 기대와 꿈이 가득했던 그때의 설렘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에게 말하고 싶다. 그녀가 뚫고 지나온 실망이라는 터널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나도, 어느 누구도 그저 희망만 펼쳐진 밝은 길은 알려줄 수 없다. 그런 길을 본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나온 길들은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였다. 그런 길을 지나며, 그녀는 등에 불을 직접 밝혀야 한다. 해야 할 일은 밝은 길만을 찾아가려 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구역에 들어설 때 등에 불을 밝힐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신데렐라의 드레스는 열두 시가 지나고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나는 열두 시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열두 시가 열두 번이 지나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젊은 날과 늙은 날에 변함없이 걸칠 수 있는 원피스가 되고 싶다. 나는 그녀가 나를 보며 지난날의 슬픔을 떠올리며 울게 하려고 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런 존재라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소각장 불길에 바스러져 사라지는 게 낫다. 그 곁에 여태껏 머물러 있는 것은, 그녀가 한 발 한 발 저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에 두려워 떨지 않도록 온몸을 감싸주고 싶기 때문이다. 나를 걸친 그녀가 젊은 날 꾸었던 푸른 꿈을, 그 어리석음을, 아름답고도 아팠던 모든 순간들을 불쏘시개 삼아 손에 든 등불을 더욱 환히 빛나게 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녀의 지친 얼굴이 앳되었던 그때처럼 다시금 천진난만한 미소를 되찾을 수 있기를.


낡아버린 나는 언젠가는 해지고 찢어져버릴 것이다. 그러면 나 또한 불쏘시개가 되어 더욱 환히 타오르리라.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그녀의 몸을 감싸주려 한다. 그녀가 변함없이 생기와 푸르름을 간직할 수 있도록, 우리 함께 지나온 세월을 떠올릴 때 '하하하!' 하며 웃는 청춘의 목소리가 어두운 터널 가득 울려 퍼지도록 만들어줄 테다.



*어제 브런치북을 지정하지 않고 올려서 다시 올립니다 ᵕ_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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