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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인숙 Jun 06. 2018

나, 천년을 살아가리라 -하이릴 안와르

-인도네시아 현대시의 개척자

인도네시아의 현대시의 개척자 - 하이릴 안와르 (chairil Anwar)



 


20여 년 동안 인도네시아에 살았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가졌지만, 부끄럽게도 내가 인도네시아 문학에 관심을 가진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가끔 한국에서 인도네시아 문학에 대해 물어오면 이미 이름이 알려진 쁘라무디아(Pramudya Ananta Toer)나 목타르 루비스(Mochtar Lubis) 정도를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들은 인도네시아의 45세대 문학(Angkatan 45)을 대표하는 문학가들이었고 한국에서 책이 출간된 적도 있었다.


 쁘라무디아는 25년 이상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올랐을 만큼 세계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절판된 책을 구해 읽기가 힘들어 겨우 한국에서 발간된 쁘라무디아의 대담집 ‘작가의 망명’을 읽은 정도였고, 간간히 칼럼이나 논문을 통해 언급된 글을 부분적으로 읽을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우연히 한국의 한 문예지에 인도네시아 시인들의 시를 소개하고 번역을 도울 기회가 있었다. 이후로 나는 좀더 적극적으로 인도네시아 시를 찾아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국민 시인 하이릴 안와르의 시집과 현재 활발한 시작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시집 7권을 사들고 왔다. 그리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현재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인도네시아 시인들의 시를 함께 읽기 시작했다.



오늘 소개할 인도네시아의 국민 시인 하이릴 안와르는 1922년 수마트라 메단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네덜란드 어와 영어에 능숙했고 두뇌가 명석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에 자카르타로 이주하였지만 부모의 이혼으로 가정 형편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더 이상 학업을 계속 할 수 없었다. 그는 세계적인 대문호들의 고전문학 작품을 읽으며 스스로 문학 수업을 하였고, 당대의 인도네시아 문학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많은 문인들과 토론을 즐겼고 기존의 관습과 관념을 무너뜨리는 과감한 행동과 발언으로 젊은 예술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로선 매우 새로운 형식과 개인적이고 서구적인 내용의 시를 썼지만, 또한 그는 타고난 저항가였다. 당시 일제 식민시대의 검열 기관이었던 Keimin Bunka Shidoso (문화지도소)를 찾아가 동료 문인들에게 일제의 문화정책에 협조하지 말라고 선동하는가 하면, 자신의 글이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면 직접 검열관을 찾아가 격렬히 저항하였고, 일제에 대항하는 문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자유분방한 사생활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수카르노(Sukarno)와 하따(Hatta)같은 거물급 정치 지도자들과 서슴없이 어울리는가 하면 거리의 여자들이나 인력거꾼,노동자들과도 친구처럼 가까이 지냈다. 그는 종종 한국의 이상 시인과 비교되기도 한다. 네 번의 결혼을 했는데 첫번째 아내는 문학비평가, 두 번째는 판사 집안의 딸, 세 번째는 창녀였다. 마지막 아내와의 결혼에선 두 다리로 일어서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딸을 낳아,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원고료를 딸에게 전달해 줄 것을 주변에 부탁하며 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딸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이름을 밝히지도 않고 다른 작가를 표절한 작품을 발표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점점 건강이 악화되면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49년 4월 28일, 27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 인도네시아는 그가 사망한 4월 28일을 ‘문학의 날’로 지정하였고, 7년 여의 짧은 시간 동안 100여 편에 달하는 시와 번역시를 남기고 떠난 젊은 천재 시인을 추모하였다. 하이릴 안와르는 인도네시아 현대문학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 올린 시인이었다.  


 

하이릴 안와르는 지독히 퇴폐적이고 허무하며 때로 지극히 서정적이다가, 삶에 대한 열정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가득한 시를 쓰는가 하면, 때로 민족주의적인 투쟁 의식으로 불타 오르는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시를 썼다. 절망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하였고, 언제나 시 앞에서 처절하였으며 자유롭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식민 지배 하에 놓인 인도네시아에서 서구 문명에 일찍 눈을 떴던 지식 계층들의 갈등, 뒤섞인 우월감과 열등감은 그의 시 곳곳에 배어 나오고 있다.  


나는 사실 그의 시 중에서 ’Mulutmu Mencubit Di Mulutku‘(너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을 때)나 그가 두번째 아내에게 바친 ‘Mirat Mudah Chairil Muda’ (젊은 미랏과 젊은 하이릴), 혹은 ‘Hampa’(공허) 같은 시들을 좋아한다. 있는 그대로 그의 맨얼굴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인도네시아 현대 시의 개척자로 불리우는 그의 대표시 ‘나’(Aku)를 먼저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나’(Aku)는 하이릴 안와르를 대표하는 시이고 대중적으로 가장 알려진 시이며 또한 그가 얼마나 삶에 대한 의지와 열정,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시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나의 부족한 시 언어로 번역하느라 애를 먹었지만, 그 작업 또한 매우 흥미롭고 가슴 뛰는 일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시인은 천 년을 더 살아내겠다고 시의 마지낙에 결의에 찬 마무리를 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 자신을 위한 다짐일까, 그를 내친 무리들에게 던지는 선포일까. 시인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시가 천 년을 살아 우리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나 (=열정)

                     하이릴 안와르

만약 나의 삶이 다할지라도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기를

당신 역시 그러하기를

그리 비탄할 필요 없는 것!

나는 무리에게 버림 받은

한 마리 야수일 뿐

탄환이 살갗을 뚫을지라도

내 분노는 굴복하지 않으리

상처와 독을 감싸 안고 달려가리라

질주하리라

모든 쓰라린 상처가 사라질 때까지

그 무엇도 개의치 않으며

나,

천 년을 더 살아가리라

Aku (=semangat)

Kalau sampai waktuku

Kutahu tak Seorang merayu

Tidak juga kau

Tak perlu sedu sedan itu!

Aku ini binatang jalang

Dari kumpulan terbuang

Biar peluru menembus kulitku

Aku tetap meradang-menerjang

Luka dan bias kubawa berlari

Berlari

Hingga hilang pedih dan peri

Dan aku akan lebih tidak perduli

Aku mau hidup seribu tahun lagi

-Chairil Anwar

*참고자료: Aku ini B ntang Jalang (koleksi sajak 1942-1949)

          Aku – Berdasarkan Perjalanan Hidup dan karya Penyair Chairil Anwar (Sjuman Djaya)

*시 번역: 채인숙.  





*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의 “채인숙의 인도네시아 문화예술기행”에 연재되었습니다. 글을 인용하거나 공유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십시오.

글: 채인숙(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였다. 1999년부터 자카르타에 거주하며 인도네시아 문화예술에 관한 글을 쓴다.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인작>과 한인니문화연구원에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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