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로 읽는 신화-와양 2편
라마단 금식이 시작되기 전 올해 5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는 일가족 4명이 동원된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너무나 비극적인 사건으로 순식간에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고, 특히 어린 자녀들이 테러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경악하며 비통함에 잠겼다. 얼마 후 우연히 TV를 켰다가 이 자살 폭탄 테러에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와양 공연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몇 개의 인형을 동시에 조종하며 스토리를 이끄는 변사 역할을 하는 달랑(Dalang)의 목소리는 애통함으로 가득 찼고, 마지막엔 우리는 절대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공연은 끝났다. 와양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그림자극이고 신화를 주된 테마로 삼지만, 현대에 와서는 이처럼 다양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와양(Wayang)은 그림자를 뜻하는 자바어 Bayang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사실 와양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다. 와양 웡(Wong-사람), 와양 골렉(Golek-나무인형), 와양 꿀릿(Kulit-물소가죽), 와양 또뼁(Topeng-가면) 등이 대표적이지만, 본래의 뜻인 그림자 극에 가장 가까운 것은 와양 꿀릿이라고 할 수 있다. 와양은 인도네시아 전통 음악인 가믈란(Gamulan) 반주에 맞춰 등불이 달린 하얀 천막 뒤에서 물소 가죽으로 만든 다양한 캐릭터의 인형을 조종하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그림자 연극이다.
특히 와양은 중부 자바를 중심으로 발달해 왔는데, 907년 경에 이 지역에서 출토된 문장에서 와양을 공연하였다는 “si Galigi mawayang”이란 문구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1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예술 영역이다. 또한 1035년 Arjunawiwaha라는 인도네시아의 옛 서사시에서 “가죽을 조각해서 만든 와양이 움직이고 말을 하면 사람들이 와양의 움직임에 따라서 울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는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11세기 경에는 와양극이 이미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되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와양은 200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되었다.
와양의 스토리는 매우 다양하지만, 인도네시아 인들에게 가장 오랫 동안 사랑을 받아 온 이야기는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 이야기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인도의 고대 서사시에서 유래되었는데, 지금도 와양 스토리로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판다와(Pandawa) 형제들의 전투 이야기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의 신화 뿐 아니라 독립전쟁을 다룬 이야기도 와양의 주요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이슬람 교리를 전하는 목적으로 와양을 공연하기도 한다.
와양은 날이 저무는 시간부터 다음날 새벽 해가 뜰 때까지 공연이 계속 되기 때문에, 인형을 조종하면서 동시에 모든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다르게 변조하며 극을 이끄는 달랑(Dalang)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달랑은 거의 10시간이 넘는 공연을 지탱해 나갈 강인한 체력을 가져야 하고, 50여 가지가 넘는 인형들을 각 캐릭터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목소리와 대사 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관객들의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자정 무렵부터 격렬한 전투 씬을 연출하며 극의 드라마틱한 절정을 이끌어 내는데 온 힘을 쏟기도 한다. 달랑은 인도네시아 인들에게 존경받는 예술인으로 주로 자바 술탄 왕궁의 하비란다(Havirandha) 전통예술학교에서 양성된다.
혹시 중부 자바를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 ‘와양 기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다. 특히 족자카르타의 소노부도요 박물관(Museum Sonobudoyo)에서는 거의 매일 저녁 와양 공연이 펼쳐지고, 와양 공방이 함께 있어서 정교한 와양 꿀릿을 제작하는 광경을 직접 볼 수 있다. 워노기리에 있는 와양 꿀릿 박물관(Museum Wayang Kulit)에서도 다양한 와양 꿀릿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한편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전통 와양 유물들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트로펜 박물관(Tropen Museum)과 라이덴의 국립민족학박물관(Volkenkunde Museum) 등에 소장되어 있다.
*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의 “채인숙의 인도네시아 문화예술기행”에 연재되었습니다. 글을 인용하거나 공유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