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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인숙 Jan 08. 2019

인도네시아 근,현대 회화사 1

간추린 인도네시아 근,현대 회화사 (1)


 인도네시아 미술의 출발점은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인류의 미술사와 궤를 같이 한다. 2014년, 슬라웨시 섬의 마로스 동굴에서 약 4만 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굴 벽화가 발견되면서 새로운 인류 미술의 발상지로 미술사를 뒤흔들어 놓았으니,사실 역사를 가늠하기도 힘들다. 인도네시아는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종족들이 각자의 문화예술을 보전하며 살아 온 오래된 땅이다. 그만큼 인류 역사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만한 엄청난 유적들과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 유물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열강의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 세계 대전 후의 이념 갈등, 그리고 독재로 이어지는 엇비슷한 역사를 가진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그렇듯이, 인도네시아도 350년이 넘는 네덜란드 식민 정부의 지배 아래서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내걸고 예술 활동을 했던 경우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그나마 각 지방과 부족들이 고유한 색채를 전승하며 조각과 공예품을 중심으로 전통 예술을 이어오는데 그쳤다.


이번 예술기행에서는 최근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근,현대 미술의 역사적 흐름을 쫒아가 보고 세계 미술 시장이 주목하고 있는 대표적 인도네시아 화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미술의 영역에 포함될 많은 분야를 다 거론할 수는 없으므로, 회화를 중심으로 근,현대 회화의 줄기를 훑어보겠다.


 인도네시아의 근대 회화는 1800년대 말 네덜란드 식민 정부의 장학금을 받고 서양으로 미술 유학을 떠난 라덴 살레(예술기행 3화 참조)에 의해 첫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서양식 미술 교육을 받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작품 활동을 하는 전문적 화가들이 이때부터 출현하였다. 그후로 현재까지 대략 3세대로 구분할 수 있는 작가군들이 인도네시아 회화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무이 인디 시대 (Sekitar Mooi Indih 1920~1938)

인도네시아 근대 회화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라덴 살레의 독보적 예술 세계가 막을 내리고, 이른바 무이 인디 시대(1920~1938)가 열리면서 부터였다.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원시의 자연과 밀림, 전통 부족 국가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당시의 예술가들은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회화 속에 표현하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를 무이 인디(Mooi Indie. 아름다운 인도네시아) 시대라 칭하며 인도네시아 근대 회화가 본격적인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시점으로 본다.


압둘라 수리오수브로토(Abdullah suriosubroto)를 비롯하여 수르조 수반토(Surjo Subanto), 바수키 압둘라(Basoeko Abdullah), 리만퐁(Lee Man Fong)  등이 무이 인디의 정신을 살려낸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그들은 낭만적이면서도 사실적인 화풍으로 식민 지배 하의 인도네시아 곳곳을 그렸고, 라덴 살레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민족적 정서가 배어나는 풍경화들을 남겼다.


바타비아(자카르타의 옛이름) 예술 동맹- Kelompok Seni Batavia을 위시하여 주로 서부 자바와 반둥(Bandung)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수많은 화가들은 석양이 지는 인도네시아의 농촌 풍경을 그리며 오래고 고된 식민지 조국에서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쓸쓸하고 참담한 심정을 회화 속에 담아내었다.



쁘르사기(Masa Pergerakan Persagi) 시대 (1938-1942)

1930년대 말, 무이 인디 시대의 화가들이 그저 아름다운 인도네시아의 풍경을 그리며 현실을 외면했던 화풍에 반기를 드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예술이 식민 지배의 암울한 현실을 직시하고 저항하며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도네시아 리얼리즘 미술은, 특히 강한 민족 정신으로 무장한 족자카르타 지역에서 활동하던 젊은 예술가들로부터 태동하였다.


  우리의 행위가 지배자에 의해 어떤 억압을 받는다고 하여도 인도네시아의 정신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예술로서 보여주자고 부르짖던 이 시기를 쁘르사기(Persagi) 시대라 칭한다. 이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근대의 아시아 화가들이 노동자와 소외 계층들의 삶을 그리기 시작했던 미술사적 배경과도 호흡을 같이 한다.


인도네시아의 리얼리즘 미술을 이끌었던 대표적 화가인 수조요노(Shindudarsono Sudjojono)는 “화가들은 미학을 찾으러 산으로 달려갈 것이 아니라 도시의 삶과 비참한 현실을 탐구하며 그려야 한다. 병, 냄비, 신발, 사무실, 의자, 숙녀, 도시, 추한 다리, 수로, 거리, 가난한 노동자들이 그것들이다” 라고 주장하였으며, 인도네시아의 참담한 현실을 통렬하게 드러내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네덜란드 식민 지배가 마지막 장을 향해 치달아가던 시점에서 인도네시아의 민족정신을 다시 불러일으키며 가난한 노동자들과 서민들의 삶을 그려낸 수조조노의 그림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지금도 가장 대표적인 민족 화가로 국민들의 추앙을 받고있다.



족자카르타(Jogjakarta)를 중심으로 프롤레타리아 미술에서 발화한 인도네시아의 리얼리즘 미술은 오또 자자(Otto Djaja), 헨드라 구나완(Hendra Gunawan) 등으로 계보를 이어갔고,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며 반일 저항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그들은 350여 년에 걸친 네덜란드 식민 지배가 끝나자 마자 일제강점기를 맞았고 태평양 전쟁의 패배로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도 다시 인도네시아를 지배하려는 네덜란드에 맞서야 했던 끝없는 역사적 고난을 그림으로 증거하고자 하였다. 끈질긴 식민의 고리를 끊어내고 완전히 독립된 인도네시아를 세우기 위해 예술가들은 그림으로 발언하고 그림으로 저항하며 기꺼이 역사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후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와 일본의 지배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인도네시아 공화국으로 우뚝 서면서 미술계는 더욱 다양하고 활발한 사회 참여적 성격을 드러낸다. 그러나 1965년의 공산당 쿠데타에서 확인되듯이 예술가들 역시 이념의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이념적 혼란기의 대표적 화가였던 헨드라 구나완(Hendra Gunawan)은 공산당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13년 동안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언제나 민중과 호흡하고 그들의 삶을 그리기를 소망했던 그는 특유의 거친 붓질로 이른바 구나완 식 화풍으로 불리우는 독특한 자신만의 화법을 구축하면서 인도네시아의 혼란한 현실을 고스란히 표현했던 대표적 화가였다.




인도네시아 근대 회화는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의 파도를 고스란히 안은 채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형태를 포기하지 않으며 변화와 시련을 헤쳐나왔다. 2편에서는 마침내 식민 지배의 암울한 현실을 뚫고 인도네시아 회화가 아시아 미술 시장의 강자로 떠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 오늘날 아시아 미술 시장에서 뜨겁게 주목 받기 시작한 인도네시아 작가들의 활약을 간추려 볼 것이다.


자료 참조: 자카르타 국립 갤러리.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의 “채인숙의 인도네시아 문화예술기행”에 연재되었습니다. 글을 인용하거나 공유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십시오.



글: 채인숙(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였다. 1999년부터 자카르타에 거주하며 인도네시아 문화예술에 관한 글을 쓴다.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인작>과 한인니문화연구원에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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