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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인숙 Mar 29. 2019

발리의 춤

발리의 춤

   - 오까 루스미니 (소설가. 1967- )


  발리는 이상한 매력을 가진 섬이다. 갈 때마다 마치 처음 찾아온 곳인 냥 낯선 풍경들을 선사한다. 수를 정확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발리를 드나들었지만 한 번도 같은 발리를 만난 적은 없었다. 스미냑Seminyak의 뒷골목에서, 우붓Ubud의 미술관에서, 따나롯Tanah Lot 사원의 파도 앞에서 발리의 햇볕은 무게가 달라진다. 대학에서 원예학을 가르치는 내 친구는 처음 발리에 와서 집 앞에 놓인 화분 하나에도 예술 감각이 살아있다고, 발리 사람들에게 예술은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그저 일상인 것 같다며 감탄했다.



▲  짜낭사리를 든 발리여인과 포즈를 취했다. [사진: 채인숙]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발리는 신과 무희들의 섬이다. 해가 뜨자마자 꽃잎과 쌀알이 놓인 아름다운 짜낭사리Canang Sari를 받쳐들고 집안의 사원과 계단 입구에 신을 위한 제물을 바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일 년의 절반 이상은 종교 의식과 축제가 끊이지 않는 곳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축제에는 반드시 춤이 등장하게 마련이므로 무희가 되는 것은 발리 여인들의 꿈이고 종교 행위의 주체가 되는 신성한 과정이다.   

  우연히 최근에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젊은 여성 소설가인 오까 루스미니가 쓴 ‘발리의 춤’을 읽었다. 그리고 발리 무희들의 삶 속에는 발리 무용을 지킨다는 자부심만이 아니라, 카스트 계급 속에서 차별 받는 여성으로서 고단한 투쟁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발리는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유독 힌두교가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강력한 힌두 왕국이었던 마자빠힛 왕조가 무너지면서 이슬람 왕조가 자바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16세기에 이르러 자바 술탄의 힌두교 박해가 심해지면서 이를 피해 달아났던 힌두교인들이 모여든 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리는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지켜지고 있다. 물론 인도의 정통적 카스트와는 달리 불가촉천민이 없고 다른 계급 간의 결혼도 종종 이루어진다. 그러나 종교가 정해놓은 신분 제도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발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 발리 출신 소설가 오까 루스미니 [사진출처: 구글이미지]





  ‘발리의 춤’이라는 소설을 쓴 오까 루스미니는 발리 태생으로 카스트 제도의 최상위층인 브라만 계급 출신이다. 그러나 자바 출신의 시인과 결혼하면서 브라만 계급의 사회적 신분을 포기했고, 이후 창작 활동에만 전념하며 발리와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재작년에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이 책의 원제목은 ‘Tarian Bumi’이다. 해석하자면 ‘대지의 춤’이라고 해야 맞지만, 한국어 판 제목은 ‘발리의 춤’으로 나왔다. 아마 소설의 내용을 잘 알리기 위한 방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발리의 춤’은 영어와 독일어 판으로도 출간되었고, 인도네시아 문교부가 주는 최고 문학 작품상, 태국 정부의 동남아시아 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작년 연말에는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문학창작 워크숍에 오까 루스미니가 초청되어 한국의 문인들과도 교류하였는데, 인도네시아의 현대소설이 한국에 소개된 예가 드물었던 탓에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 발리 춤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발리의 춤’은 책 첫머리부터 카스트 신분 중에서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하는 수드라 계급의 아름다운 여성인 루 스까르가 브라만 계급 남성과의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루고 발리 최고의 무희가 되려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녀는 결국 꿈을 이루지만 무능력한 남편과 시어머니의 구박 속에서 오로지 외동딸 뜰라가를 최고의 귀족으로 키우는데 삶의 목적을 둔다. 하지만 뜰라가는 오히려 수드라 계급의 남자인 와얀과 사랑에 빠지고 온갖 역경과 모욕을 견디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자 몸부림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남편 와얀이 일찍 병으로 죽자, 시어머니는 이 모든 것을 뜰라가의 탓으로 돌린다. 수드라 계급의 여성이 브라만 계급의 남성과 결혼하여 귀족이 되는 일은 종종 묵인되어 왔지만, 반대의 경우는 반드시 큰 불행을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뜰라가는 시어머니의 오해와 주변의 시선을 불식시키기 위해 브라만 계급의 신분을 완전히 벗어던지는 의식을 치루기로 한다. 완전한 수드라 계급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어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고, 자신과 와얀의 딸 루 사리의 손을 잡은 채 귀족 사원을 나간다. 루 스까르는 끝내 딸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않았고, 단지 흰 천에 싸인 비녀 하나를 뜰라가가 서 있는 정원으로 던진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넌 비범한 여성이다, 뜰라가. 네가 내 손녀라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구나.”라며 자신이 택한 삶을 스스로 책임지려 하는 뜰라가를 안아준다. 뜰라가는 수드라의 나이 든 여성이 자신의 머리를 밟고 그 위에서 발을 씻는 모욕을 감내하며 완전한 수드라 계급의 여성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내 삶은 뜰라가로서의 빛나는 역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해”라고 혼잣말을 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경험이 녹아있을지 모르는 소설을 읽으며 ‘Tarian Bumi – 대지의 춤’이라는 책의 원제목을 떠올렸다. 작가는 신분 제도의 억압 속에서도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려는 발리 여성들이 바로 대지이며, 땀과 불로 가득 찬 그녀들의 삶이 춤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니까 발리의 춤은 그녀들의 강인한 모성과 인내와 열정을 상징하는 것이다. 발리의 춤은 대지의 춤이고, 어머니의 춤이고, 신을 향한 여자들의 춤이다. 촘촘하고 섬세한 묘사라던가 미학적인 문장의 맛은 없었지만, 소설은 서사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를 매료시킨다.



  마침 책은 읽은 후에 다시 찾은 발리에서 바롱댄스가 열리는 작은 공연장을 발견했다. 식당을 겸한 곳이었다. 선을 상징하는 바롱이 등장하기 전, 악을 상징하는 랑다의 시녀로 분장한 두 명의 어린 무희가 눈알을 굴리며 간추린 형식의 1막을 공연하고 있었다. 무대는 다듬어지지 않았고 중학생 쯤으로 보이는 무희들의 춤은 아직 어설펐다. 다른 때였더라면 무성의한 공연에 기분이 상했을 테지만, 언젠가는 커다란 부다야 공연장에서 정식으로 바롱댄스를 추게 될 어린 무희들을 격려하며 누구보다 크게 박수를 쳤다. 그녀들이 어린 뜰라가의 분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TV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였고, 인도네시아 문화 예술에 관한 칼럼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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