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가 되었거나 전설이 된 예술가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죽은 자들이다. 지금 살아서 쓰고 있거나 그리고 있는 자들 어느 누구도 죽은 그들을 따를 자는 없다. 죽음은 죽음 자체로 거대하고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서 현재진행형의 어떤 위대한 삶도 무릎을 꿇린다. 더구나 그가 어느 분야에서 <최초>를 만들어 낸 선구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전에 없었던 세계를 처음 드러내 보여준 자가 죽음 뒤에 가지게 되는 신화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일구어 낸 예술의 깊이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혹은 그것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모멸과 모욕까지 오히려 영광되게 만든다.
인도네시아 최초의 근현대 화가, 라덴 살레(Raden Saleh Sjarif Boestaman. 1811~1880)가 바로 그런 이름이다. 아마도 인도네시아에 살고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그는 1800년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최초로 유럽으로 미술 유학을 떠났고 서양식 미술화법을 들여 와, 근현대 미술사의 출발점에 홀로 우뚝 서 있던 화가였다.
(사진/ 라덴 살레의 자화상)
인도네시아가 여전히 네덜란드 령이던 1811년. 라덴 살레는 중부 자바의 스마랑에서 명성이 높았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당시 중부 자바는 인도네시아 인들에게 지금도 가장 자랑스럽게 기억되고 있는 디뽀네고르 왕자의 독립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이었다. 라덴 살레 집안은 거슬러 올라가면 아랍계의 지방 귀족이었지만, 왕자의 독립 운동을 전면에서 적극 지지하며 강한 독립 정신을 드러내던 가문이었다.
라덴 살레는 8세가 되던 해, 인도네시아로 온 벨기에(당시는 네덜란드 남부) 인에게 처음 그림을 배운다. 이 유럽인 화가는 어린 라덴 살레의 뛰어난 미술적 재능을 단숨에 파악했다. 덕분에 당시로서는 접할 기회조차 없었던 유화를 처음 배우면서 그의 재능은 점점 빛을 발했다.
그리고 마침내 1829년. 자바인의 풍습과 자연,그리고 문화를 연구하여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는 임무를 수행하러 인도네시아에 온 네덜란드 관리인 파옌(Payen)의추천을 받아 라덴 살레는 유럽으로 그림 공부를 하러 떠나게 된다.
네덜란드에 처음 도착한 그는 코르넬리위스 크뤼세만(CorneliusKruseman)과 안드리스 스헬프하우트(Andries Schelfhout)의 문하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하면서 수많은 유럽의 화가들과 교류했고 그들과 영향을 주고받았다. 당시로선 아시아 인화가가 유럽에서 활동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으나 뛰어난 초상화 기법을 인정받아 네덜란드 왕 빌럼 2세의 궁정화가로 활약했고, 여러 유럽 궁정들에 초대받아 머물며 그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사진/ 라덴 살레가 그린 유럽의 겨울 풍경들)
라덴 살레는 20년 동안 유럽에 머물면서 다양한 나라와 도시를 돌아다니며 많은 풍경화를 그렸다. 특히 외젠 들라크루아(EugeneDelacroix) 등의 프랑스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낭만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헤이그와 암스테르담에서 여러 번의 전시회를 열었고 당대의 아시아 화가 중 단연 돋보이는 국제적인 명성도 쌓았다. 그러나 라덴 살레는 유럽에서도 네덜란드에 머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식민지 나라에서 온 백성으로서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했던 차별과 보이지 않는 멸시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가 그린 겨울 풍경은 20년 간 유럽을 떠돌면서 늘 자바의 뜨거운 햇볕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그의 고독한 내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겨울 풍경은 어느 부분도 허투로 버려두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쓸쓸하고도 처연한 겨울빛으로 뒤덮혀 있다. 그는 풍경을 그렸지만 우리는 그를 둘러싸고 있었을 지독한 외로움과 상실감을 함께 느끼고 그 옆에 우두커니 서서 풍경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미술에 반영된 자연은 언제나 화가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라덴 살레는 1851년 인도네시아로 돌아와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로서 활약하며 술탄 왕족의 여인과 결혼까지(첫 결혼은 실패했고 곧 재혼을 했다) 했다. 그러나 정작 고국으로 돌아 온 후에는 떠나온 유럽을 그리워하며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숙명적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야 했다.
(사진 / 뿐짝 고개- 라덴 살레)
나 역시 라덴 살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디뽀네고르 왕자의 체포’를 통해서 그의 그림을 처음 접했지만, 정작 나를 매료시킨 것은 그가 그린 자바의 풍경화였다. 그 풍경화는 내가 수십 번은 가보았던 반둥 가는 길목의 뿐짝 고개를 그린 그림이었다. 정말 화가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본다면 누구라도 들라크루아나 컨스터블을 연상케 하는 유럽의 대가가 그려낸 풍경화로 짐작할 만큼 구조와 기법 뿐만이 아니라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대자연의 기운이 깊은 밀도감을 드러내고 있는 그림이었다. (몇년 전 한국의 한 미술관에서 그의 자바 풍경화가 전시되었을 때, 사람들은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19세기의 아시아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감탄을 쏟아냈다고한다. 한 마디도 틀리지 않다)
그림에는 1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뿐짝 어느 산길에서나 만날 수 있는 밀림이 옆으로 깊게 펼쳐져 있다. 열대림 사이로 길게 뻗은 신작로는 아마도 이제 막 길을 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밀림 저 너머의 빛을 향해 휘어져 가는 듯한 신작로 이편에는 순다 지방의 전통 가옥들이 나란히 서 있다. 빛에 노출된 나무 줄기와 덩굴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치밀하고 섬세한 화가의 손길을 거쳐 장엄한 대자연의 이미지를 당당히 드러낸다. 그 대자연 속으로 난 길을 사람들이 말과 마차를 타거나 천천히 걸어지나가고 있다. 길 저 너머의 빛이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상징한다는 해석을 본 적도 있지만, 굳이 그런 거창한 의미를 부여해야 할 이유도 느끼지 못할 만큼 그림은 풍경화 그 자체만으로 이미 훌륭했다.
(사진/ 디뽀네고르 왕자의 체포- 라덴살레 )
1978년 네덜란드 왕실은 라덴 살레의 대표작인 ‘디뽀네고르 왕자의체포’를 인도네시아에 반환하였다. 아마도 인도네시아 인들은 마치 디뽀네고르 왕자가 살아온 듯 기뻐했으리라. 디뽀네고르 왕자는 인도네시아 인들에게 독립과 저항의 상징으로 불리우는 이름이다. 족자카르타 술탄 왕궁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끊임없이 네덜란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을일으켰고, 디포네고로 전쟁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자와 전쟁(1825~1830)을 직접 이끌었다. 5년 간의 전쟁 기간 동안 20만 명이 죽어중부 자바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 정도였다니 저항의 기운이 얼마나 거세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결국 네덜란드 군에게 체포된 왕자는 슬라웨시의 마카사르에 유폐되었고, 그 유명한 ‘디뽀네고르 연대기(Babad Diponegore)’를 남기고 1855년, 유배지에서 포로의 신분으로 사망하였다.
라덴 살레는 디뽀네고르 왕자와 같은 중부 자바 출신인 자신이 전쟁에 참여하지도 못했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음을 자책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게다가 이 그림을 그렸을 당시는 인도네시아로 돌아와 식민 정부의 예술품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어떤 복잡한 심경을 안고 그림을 그렸을지 조금은 짐작이 된다. 그는 디뽀네고르 왕자가 네덜란드 관리들에게 체포되는 순간 왕자의 등 뒤에서 얼굴을 파묻고 울고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으로 일종의 속죄 의식을 치뤘다. 조금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만큼 네덜란드 관리들의 얼굴을 크고 하얗게 그려서 그들의 폭압을 회화화시키려 한 의도는 이 예민하고 심약한 화가의 정직한 고뇌를 그대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라덴 살레는 지금도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많은 전시 관람객을 동원하는 대표적 이름이다. 몇 년 전 인도네시아 국립 미술관에서 “나는 디뽀네고르 왕자다” 라는 타이틀을 건 그의 전시회가 열렸는데 수많은 관객들이 몰려 전시 일정을 연장하는 뜨거운 호응을 얻기도 했다. 라덴 살레와 디뽀네고르라는 이름이 한데 묶여 인도네시아 근현대 미술은 당당한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글: 채인숙(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였다. 1999년부터 자카르타에 거주하며 인도네시아 문화예술에 관한 글을 쓴다.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인작>과 한인니문화연구원에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