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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인숙 Apr 15. 2016

석양의 얼굴 -바수키 압둘라

 

 바수키 압둘라 BasoekiAbdullah (1915-1993)


           


    바수키 압둘라는 인도네시아 리얼리즘 미술의 선두에 늘 이름이 걸린다. 하지만 그는 특이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더 유명한데, 대통령에서 길거리의 아이들까지 그의  모델들은 계층의 구분이 없었다.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흰 제복을 입은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의 젊은 시절 모습도 바수키의 작품이다. 인도네시아가 350년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후 그는 대통령 궁의 전속화가로 발탁되었는데, 아마도 수카르노의 초상은 그때 그려졌을 것이다. 독립을 위해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던  젊은 투사가 사랑하는 조국의 첫 대통령이 되었으니, 수카르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바수키는 화가로서 명예롭고 행복했을까…? 그가 살아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다.



( 수카르노의 초상- 바수키 압둘라)



    그는 대통령 궁의 화가였지만 언제나 민중들의 삶을 그리기를 소망했다. 그의 그림 속 자바(Java) 섬 사람들은 자바 종족 특유의 온화함과 신이 내려주신 삶을 거스러지 않으려는 순명의 얼굴을 하고 있다. 흔히 자바의 색으로 지칭되는 갈색의 배경은 마치 낡고 거친 질감의 옷을 입은 듯하고 사람들은 지치고 텅 빈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애초에 자신들이 가졌던 가난하고 불공정한 삶에 대하여 의문을 품거나 분노할 생각이 없다. 그것은 원래 그래왔던 것이고 신의 뜻이었으며 그들은 스스로 신이 주신 그 운명을 수락하였기때문이다.


 

    바수키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자’와 ‘남매’는 아마도 몹시 가난한 가족일 것이다. 아버지는 없거나 가족을 버리고 떠났을 게 분명하다. 어찌된 일인지 이 나라에선 남자들이 자신의 아이를 낳은 여자를 버리고 가는 걸 공공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집안 일을 도와주는 여자들이 그런 일을 당하고 올 때마다 화가 정말 많이 났었는데, 이제는 하도 많이 봐와서 나도 그냥 그런가 부다, 할지경이다) 게다가 인도네시아에서는 일부다처제가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내가 처음 인도네시아에 왔을 때만 해도 예사로 아내를 두세명씩 거느리고 사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나마 남편의 수입을 아내들에게 공정하게 분배한다는 게 다행한 일이긴 했지만…

 


( 모자 –바수키압둘라)


( 남매 –바수키압둘라)



     그러니 결국 지치고 나약한 모습으로 아이를 키우고 가장 밑바닥 자리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은 언제나 여자들의 몫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림 속 젊은 엄마의 삶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선은 불안하고 맥없이 아래를 향해 있고 머리에는 히잡이 아니라 머릿수건을 둘렀다. 낡은 슬렌당으로 둘러업은 아이는 천진하고 호기심어린 눈동자로 엄마의 등 뒤에 매달려 있다. 덩치가 제법 커진 남동생을 업고 더위에 지쳐 걸어가는 누나의 모습을 그린‘남매’ 역시 마찬가지다. 두 그림은 한 가족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이 땅의 수많은 엄마와 누이들은 무슨 힘으로 저 극한의 궁핍과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어 냈을까?  정말로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었을까…?

 


( 여인–바수키압둘라)


        

   지난 주에 나는‘여인’을 다시 보기 위해 파타힐라 광장의 한 박물관을 찾았다.

‘여인’은 내가 바수키의 초상화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다. 그가 그린 젊은 자바의 여인은 깊은 눈매와 조금 긴 듯한 콧날을 가졌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리 멀지 않은 시선으로 창문 너머 어디쯤을 바라보고 있다. 단단하고 이지적인 이마가 그녀의 조용하고 깊은 내면을 드러내고 귓볼에 박힌 작은 귀고리가 소박하면서도 단정한 그녀의 성품을 짐작케 한다. 어떤 슬픔과 폐허를 감추었으나 강약을 드러내지 않는 말투로 그녀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응시하며 내게 말을 건다. 그녀의 눈동자는 사납지 않고 당당하여서 어떤 모멸스럽고 절망스러운 현실도 자신만의 지혜로 헤쳐나갈 것 같다. 그녀의 얼굴에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그녀만의 열정을 읽어 내었다면, 아름다움은 ‘성격’이라고 했던 어느 예술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깊은 통찰력과 지혜, 자신만의 열정을 ‘성격’으로 가진 아름다운 여자들이 이 땅에서 좀더 당당하게 살아갈 날을 소망한다.

 


( 경작 – 바수키압둘라)



      세계의 섬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산다는 자바(2014년 기준)에는 인구만큼 논이 많다. 학교 다닐 적에 우리 나라 국토의 70퍼센트가산이라고 배웠을 때는 사실 별로 실감이 안 났는데, 국토의 그만큼이 농지인 자바 섬에서 살다가 한국에 가면 정말 한국이 산이 많은 나라라는 게 금방 눈에 들어온다. 바수키 압둘라가 인도네시아의 대표적 리얼리즘 화가로 불리우는 이유는 그가 자바와 발리의 논과 밭, 그리고 그 땅에서 삶을 꾸리는 농부들의 삶을 그리는 것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바 땅과 농부들에 대한 애정이 특별했다. 인도네시아에선 지금도 농촌에 가면 소가 쟁기질을 하는 풍경을 종종 마주치게 되는데, ‘경작’이라는 그림에 등장하는 소들은 보기만 해도 기운차다. 살집이 좋고 다리는 단단하며 위로 치솟아 있는 뿔이 당당하고 활기있다. 농부는 고개를 숙이고 마악 소가 땅을 갈고 나간 모양을 확인하는 중이다. 인도네시아는 3모작이 가능한 나라다. 한국에서 놀러왔던 가족들이 이쪽 논에서 연방 모내기를 하고 있는데 저쪽 논에선 벼를 베는 광경을 보고는 너무나 신기해 했었다. 이 축복 받은 풍요의 땅에서 그림 속의 농부는 알이 꽉 찬 곡식을 거두기 위해 적도의 햇볕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다.

 


(석양 – 바수키압둘라)



      그러나 나는 바수키가 그린 수많은 농작지의 그림 중에서 ‘석양’이 내리는 저녁 무렵의 계단식 논 풍경을 좋아한다.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 리얼리즘 미술전에도 내걸린 적이 있는 작품이다. 하루종일 열심히 일하던 농부들도 모두 떠나고 텅 빈 듯 보이는 논에 석양이 깔리기 시작하는 모습은 낭만적이면서 조금은 쓸쓸하다. 유난히 붉은 빛을 띤 적도의 석양은 논과 논 사이 작은 숲과 집들 위로 평온하고 아름답게 스민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빛을 뿜어내던 태양이 미처 숨기지 못한 한낮의 정열을 한 숨씩 누그러뜨리는모습을 비밀스럽게 지켜본다.


 

     바수키는 ‘석양’을 주제로 한 연작을 계속해서 그렸다. 수카르노 시대가 막을 내리고, 그는 수하르토가 공산당을 척결한다는 명목 하에 수만 명의 양민들을 학살한 뒤 32년 간이나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처절한 현장을 지켜보아야 했다. 수카르노의 초상화가였던 바수키는 그 쓰라린 심정을 스러져가는 석양으로 그려내었던 것일까.



(바수키 압둘라의 초상)



         1993년, 그는 불행하게도 강도가 쏜 총을 맞고 자택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수많은 억측이 오갔지만, 그저 집안의 정원사와 강도가 범행을 공모했다는 짧은 신문 기사만이 실렸을 뿐이었다. 그가 죽을 당시에 그리고 있던 그림은 훗날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이 된 하비비의 초상화였고 마지막으로 읽고 있던 책은 하비비의 자서전이었다. 아마도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는 하비비에 대해 더 깊이 알아야 했을 것이다. 반쯤 완성된 하비비의 초상화는 그가 죽은 뒤 하비비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마치 미리 씌여진 드라마처럼 1998년에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수하르토 정권이 무너졌고 곧이어 하비비가 인도네시아의 제3대 대통령이 되었다. 끝내 완성되지 못한 바수키 압둘라의 마지막 초상화는 소용돌이 치는 인도네시아 역사의 한가운데서 그날까지도 석양의 얼굴을 한 채 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이 그리던 마지막 초상화의 주인공이 대통령이 되는 광경을 하늘에서 지켜보면서 바수키는 마지막까지 화가로서 명예롭고 행복했을까? 나는 처음과 똑같은 질문을 다시 그에게 던지고 싶어지는 것이다.




글: 채인숙(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였다. 1999년부터 자카르타에 거주하며 인도네시아 문화예술에 관한 글을 쓴다.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인작>과 한인니문화연구원에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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