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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인숙 Oct 12. 2017

가까운 곳의 미술, 빠사르 스니

(Ancol, Jakatra)

예술 작품에는 타인의 경험이 대단히 정교하게 축적되어 있고, 잘다듬어지고 훌륭하게 조직된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예술은 우리에게 다른 문화의 목소리를 들려주는가장 웅변적인 예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예술 작품과의 교유는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한 이해력을 넓혀준다. /알랭드 보통


거창하게 세계에 대한 이해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소하게는 거실이나 현관 입구에 그림 한 점이 걸려있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이 얼마나 다른지 말이다.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 내 시선을 가장 먼저 끌어당기는 것은 그 집의 책꽂이에 꽂힌 책이나 벽에 걸린 그림 같은 것들이다.아름다운 가구, 예쁜 그릇에 담긴 맛있는 음식들이 나를 감탄시킬 때도 많지만, 그 사람이 읽는 책과 늘 시선을 두는 그림이야 말로 집 주인의 내면 세계를 짐작하고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고 믿는다.



 

우리 집에 걸린 그림으로 말하자면, 그리 비싸고 유명한 화가의 그림은 아니다. 그저 발길이 머물렀던 전시회에서나 혹은 아는 화가의 작업실에서 내 마음을 당겼던 그림들을 하나씩 사 모아둔것들이다. 아름답거나, 화려하거나, 소박하거나, 거칠거나, 슬프거나, 혹은 우울하고 매혹적이었거나... 그저 한 순간이라도 내 마음을움직였고, 일상을 균열시키는 감동을 주었다면 그 그림은 이미 훌륭하다고 믿는다.




빠사르스니는 자카르타의 가장 큰 유원지 중에 하나인 안쫄에 있는 예술촌이다. 대부분 아직 무명이거나 혹은막 갤러리의 호출을 받기 시작한 젊은 화가들의 작업실이 밀집해 있다. 지금은 꽤 유명한 갤러리에 그림을 올리는 인도네시아의 화가들도 이곳을 거쳐간 친구들이 많다.



이곳은 1974년에 세워져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해 왔다. 주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화가들이지만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거나 유명한 스승 밑에서 제자 수업을 받으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이들도 많다. 가장 나이가 어린 화가는 현재 31살이고, 벌써 60대를 넘긴 노화가들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아직은 가난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는외국 대사관의 초대전이나 각 도시나 단체의 전시회를 통해 젊고 주목받는 예술가들로 그림을 거는 이들도 많다.




인도네시아에도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많은 화가들이 있다. 그들의 그림은 한눈에 나를 매료시키지만 직접 구매를 하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림이 고플(?) 때 나는 빠사르 스니로 간다. 100여 명의 화가와조각가, 인도네시아 전통 공예가들의 작은 작업실을 천천히 돌면서, 화가들이작업하는 모습을 옆에 앉아서 보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그림 앞에 오래 머물면서 화가와 직접 그림 값을 의논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간절한 내 눈빛을 보며 적당한 선에서 구매가 성사된다.  



빠사르스니에서 작업하는 화가들 중, 근래 자카르타에서 개최되는 각종 전시회에서 자주 이름을 발견하게 되는화가들을 꼽자면, 데니 보종 (Deny Bojong), 쭈붕 (Cubung WP), 디딧 (Didit affandi) 같은 이들을소개할 수 있겠다. 그들은 인도네시아 헤리티지 테마 전시회나 쿠바 대사관을 비롯한 외국 대사관들의 초대전시회, 혹은 각 대학들의 인도네시아 젊은 미술 세미나 전에서 자주 마주치는 이름들이다.


데니 보종과 그의 그림 - 자유



이제 막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기 시작한 화가들의 새로운 작품들을 날것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빠사르 스니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다. 그리고 독특하고 다양한 민예품이나 조각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직은 선뜻 그림을 구입하기가 망설여진다면 작은 소품이나 공예품을 하나쯤 고르면서 여유있는 시간을 즐기는 것도 좋다. 좀 더운 게 흠이지만, 생수 한 병 들고 천천히 쉬어가면서 화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더위 쯤은 그리 문제될 것도 없다. 아,참. 뿌리거나 바르는 모기약도 들고 가는 게 좋겠다.



인도네시아에는 정말 많은 미술 갤러리들이 있다. 어느 도시를 가도 그곳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갤러리가 반드시 있다. 자카르타만 해도 아마 수십 개는 족히 넘을 것이다. 예술을 사랑하고존중하고 전통을 지켜 나가려는 인도네시아 인들의 높은 문화적 자존감은 가끔 경탄스럽다. 무엇이건 화려하고깨끗하고 새로워야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개발중독에 걸린 우리는, 좁은 길을 절대로 넓히지도 않고낡은 네덜란드 시대의 건물들을 쉽게 허물려고도 하지 않는 인도네시아가 답답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역설적이게도 나는 그것이 인도네시아가 가진 힘이라고 믿는다.




인도네시아 현지 친구들의 집을 방문할 때가 있다. 갈 때마다 나를 놀라게 하는 건, 그들이 예술에 대해 품고있는 사소하고 일상화된 사랑이다. 정말 거의모든 친구들의 집에 마치 갤러리처럼 수많은 그림들이 걸려 있다. 그들에게 그림을 사고 거는 일은 그저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예술을 즐기는 일이다. 특히나 놀라운 것은 유명한 외국 화가들의 작품보다는 대부분 인도네시아 화가들의 그림을 열심히 구매하고 그들의 활동을 눈여겨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그림에 대해 자랑스럽게 설명하고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그림이 투자의 목적이나 재산의 개념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그냥 삶 속에서 예술에 대한 깊은 경의와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습관이 몸에 배여있다. 예술가는 신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므로, 집안에 예술가가 있다는 걸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 길도 넓고 차도 쌩쌩 달리고 높은 건물들이 쭉쭉 뻗어있는 선진국에서 살아 온 우리들은 과연 작은 액자에 걸린 그림 한 점을 차분히 바라보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만한 마음의 여유와 깊이를 가졌는지를 따져보면 사실 좀 부끄럽다.



혹시 자카르타에 놀러올 일이 있다면, 빠사르 스니로 가서 가깝고 친근한 젊은 인도네시아 미술을 만나보길 권한다.



글: 채인숙(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였다. 1999년부터 자카르타에 거주하며 인도네시아 문화예술에 관한 글을 쓴다.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인작>과 한인니문화연구원에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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