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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인숙 May 29. 2017

가족의 이름으로 -헨드라 구나완


헨드라 구나완 (HendraGunawan) 1918-1983





어느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내었던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가 열대의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건, 사계절의 아름다운 변화를 즐기는 나라에서 살았던 인물이건, 늘 어둡고 추운 기운이 느껴진다. 완전히 자유롭기를  갈망했기 때문에 예술가가 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곧잘 시대적 사명에 속박당하거나 물리적인 압력에 갇히곤 했다. 그리고 사력을 당해 자신들이 가져야 할 정당한 자유를 예술로 표현하며 견디었다. 그런 점에서 헨드라 구나완은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질곡을 온 몸으로 겪어낸 가장 상징적인 이름이다.



핸드라 구나완



인도네시아의 현대사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점을 꼽자면, 아마도 수카르노 정권이 무너지고 수하르또 정권이 들어서는 1960년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965년 9월, 반제국주의와 친공산당 정책을 펴 나갔던 수카르노 정권이 위기를 맞으면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를 지지해 온 아이디트 공산당 위원장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러나 육군 엘리트 부대의 사령관이었던 수하르토에 의해 쿠데타는 즉각 진압되었고, 당연한 수순처럼 공산당을 향한 혹독한 탄압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오늘 인도네시아 예술기행의 주인공인 헨드라 구나완은 공산당을 지지한 예술가로 지목되어 1965년부터 1978년까지 무려 13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한다. 그는 족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민중의 화가들’ 그룹을 창립하였고 리얼리즘 예술을 주도한 쁘르사기 (Persagi) 협회에서 활약하였으며, 독립 이전에는 식민 지배의 부당성을 주창하는 그림을 줄곧 그렸고, 독립 이후에는 빈민과 농촌의 삶을 그리는데 천착했다.  





오늘날 그의 그림은 인도네시아의 예술 공연장이나 공공장소에서 가장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그림이 되었지만, 시대적 시련을 오로지 그림으로 표현하며 견디어 냈던 화가로서의 삶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에는 유난히 가족이 많이 등장한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수 있는 <나의 가족>은 그가 13년간 갇혀있었던 감옥으로 가족들이 면회를 온 날을 그린 그림이다. 아버지 옆에 달라붙어 떠날 줄 모르는 아들을 목마 태우고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다. 원색의 끄바야와 와양과바틱 무늬의 전통 치마를 입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아내는 무심한 듯하나 눈빛이 당당하다. 아내와 딸이 입고있는 인도네시아 전통 의상과 문양은 그의 가족들이 가진 강한 민족 정신과 자주성을 보여준다. 그는 어떤 그림에서나 강렬하고 초현실적인 힘을 보여주는 원색의 전통 바틱 의상을 입은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가족들 뒤로는 회색의 감옥 건물이 보이고, 면회를 온 다른 가족들이 마치 축제라도 즐기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민중들의 강한 생명력과 의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장면이다.


가족




앞서 말했다시피, 그의 그림은 대부분 강하고 독립적인 원색으로 무장되어 있다. 심지어 피비린내 나는 독립 투쟁의 현장을 그린 <알리 사디키의 독립 투쟁>에서도 그의 그림은 색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얽혀있다. 이 그림은 작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430만 달러에 육박하는 경매가를 기록하며 아시아 미술 시장을 놀라게 했는데, 그의 그림은 오늘날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에서 회를 거듭하며 동남아시아 미술 시장의 판도를 바꾸어놓는 높은 경매가를 올리고 있기도 하다. 나는 이것이 어둡고 습한 역사의 뒷면을 주저없이 성큼성큼 걸어온 한 화가에 대한 경외이자 찬사의 표현일 거라 믿고 싶다. 헨드라 구나완의 캔버스를 덮고있는 모든 인물들의 눈빛은 그래서 당당하고 강렬하고 의연하다.




그러나 끊임없이 그의 그림의 화두는 가족이었다. 자화상을 그릴 때조차 그는 아기를 안고 다정하게 미소짓는 자신을 그리기를 즐겼다. 아버지의 수염을 당기며 천진하게 웃고 있을 아기의 뒷모습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한다. 그는 화가이자 시인이고 조각가이며 게릴라 전사였으나,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아버지이고자 했고 남편의 자리를 지키고자 했다. 감옥에서도, 독립 투쟁의 현장에서도, 그를 붙들어 준 것은  거창한 정치적 사명이나 철학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아내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고 지그시 눈을 감고 앉아있는 그의 그림 <아내와 나>를 보면서, 밤마다 어두운 감옥 안에서 가족과 시대 앞에 당당한 아버지가 되고자 했던 그의 절절한 일기를 읽는다. 그가 목울대를 치고 오르는 울분을 삼키며 그렸을 그림 앞에서 그래서 나는 번번히 눈시울이 뜨겁다.





글: 채인숙(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였다. 1999년부터 자카르타에 거주하며 인도네시아 문화예술에 관한 글을 쓴다.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인작>과 한인니문화연구원에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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