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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젬프리스 Aug 08. 2020

꽉 찬 마음 덜어내기

내 안의 나를 마주하는 시간

사춘기 시절 내가 가장 의지했던 친구는 바로 라디오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그 시절 울렁거리는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듯했고 차분히 말을 걸어오는 디제이의 목소리는 생각 많고 뭐가 그리도 복잡했을까 싶은 혼란스러운 소녀의 마음을 알아주는 듯했으니까.

그렇게 매일 정해진 시간이 되면 나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고 그곳에서 흐르는 내 맘 같은 음악들을 놓칠세라 카세트에 공 테이프는 늘 대기모드였다. 프로그램을 여는 시그널 음악이 내 귀에 들려오고 그 시간 나는 자물쇠가 달려있는 일기장을 열어 차고 넘치는 생각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금융권 사내방송 아나운서 생활을 5년 가까이하면서 그때부터 나는 라디오 디제이를 꿈꾸었다. 처음에는 막연히 내가 직접 라디오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고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으면서 라디오는 꼭 이루고 싶은 사랑이 되어갔다. 하지만 나 같은 일반인이 라디오 디제이가 된다는 건 좋아하는 연예인과 결혼하는 것이 꿈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실에서 라디오 디제이는 연예인이거나 연예인만큼 유명하거나 공중파 아나운서들의 몫이었으니까. 그렇게 라디오 디제이는 내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올려다보기에 높디높은 나무였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아이가 잠이 들어 나만의 시간이 찾아오면 나는 노트북을 열고 그간 쌓인 내 마음속 이야기들을 덜어내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임신출산, 육아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이 송두리째 변해버린 것 같은 상황에서 나를 찾기 위해 몸부림을 칠 수 있었기에.


아이가 만 세 살이 되고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강의를 하게 됐다. 내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강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건 그동안 한 순간도 잊어본 적 없었던 내 사랑, 라디오 디제이처럼 마이크 앞에 선 다는 그 이유 하나였다. 강의가 시작되면 나는 나만의 오프닝으로 그 시간을 열었고 정해진 시간이 다 되어갈 즈음엔 내가 선곡한 곡이 흐르며 나만의 클로징으로 강의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나는 강의를 하는 사람이었지만 내 안에서 나는 라디오 디제이였다.




여러 방송사에서 가수 오디션이 붐을 이루던 2012년, 경기도 공중파 라디오 채널이 주최하는 디제이 오디션 공고를 보게 됐다. 늘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애틋하기 그지없는 내 사랑 라디오,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나는 서류전형에 지원했다.

하지만 단 한순간도 잊어본 적 없던 내 사랑을 이루기 위한 길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서류전형을 통과한 후 164강, 82강, 36강, 18강, TOP 10, 4 강등 내가 넘어야 할 산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저 멀리 전라도에서 예정된 아침 9시 강의를 위해 첫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에서, KTX를 타고 대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자동차를 몰고 대전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도 나는 아무도 모르는 내 안의 디제이가 아닌 진짜 디제이가 될 준비를 했다. 그렇게 82강에 들기 위해 마이크 앞에 앉아 3분 자기소개를 하던 날, 라디오 부스 안에 있던 내게 어느 피디분이 이렇게 말을 했다. “여명의 Try To Remember를 들려줄 테니 어떤 이야기든 한번 해 보세요”헤드셋을 통해 곡의 전주가 흐르고 벅차오르는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멀리서 바라만 보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왔습니다. 자동차를 몰고 이곳으로 오는 길,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어요. 그리고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까 봐 두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행복해요.”           




2013년 3월 11일, 나는 진짜 라디오 디제이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게 꿈을 이루었다고 했지만 나는 하루하루 꿈을 꾸는 듯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두 시간, 내가 마이크 앞에 앉기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 역시 그들과 만나는 그 순간만을 위해 내 시간들을 아낌없이 채워나갔다.

그런데 내가 너무 오래 꿈을 꾸었던 것일까.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누군가 나를 큰소리로 깨웠다. 그만 꿈에서 깨어나라고. 이제 더 이상은 꿈을 꿀 수 없다고.


그렇게 나는 라디오와 이별했다.  

하루아침에 라디오 밖으로 나온 나는 한동안 음악을 들을 수 없었고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된 음악이 방송 중 청취자들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 때면 가슴속에 뜨끈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문득문득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청취자들이 그립고, 눈이 부시게 하늘이 파란 날, 장대비가 쏟아지는 어느 오후, 괜스레 지치는 날, 이럴 때 이런 음악들을 함께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 외출이 어려운 요즘 그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우린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도 되뇌어 본다.




오늘도 어김없이 나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시간,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리고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런저런 마음들을 하나씩 덜어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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