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자아와 세상 그 사이의 낀자아

by 젬툰

우연히 “커피 테이블에 올려두고 싶은 책“이라는 기고를 청탁받아서 읽다만 인간 실격을 다시 꺼내 들었다. 내 마음을 살 찌운 BMI 지수 18/100


자아와 세상 사이에 또 하나의 내가 있다. 그걸 뭐라 이름 붙일까. 자아와 세상 사이에 있으니 낀자아라고 하자. 실제의 자아는 그냥 존재 그 자체다. 좋다 나쁘다 어떻다 저떻다 평가할 게 없다.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고 있으며 그러다 죽는다. 하지만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때로는 나에게 힘을 주고 가끔씩 나를 괴롭게 만드는 건 자아와 세상 사이의 낀자아다.


이 낀 자아는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건다.

“야, 회사 김 부장이 너 싫어하는 거 같은데?”

“너 내년에 회사 잘리면 뭐 먹고살래?”

“너 지금 이렇게 살아서 60살에 폐지 줍는 거 아니야? “

“너랑 썸 타는 걔, 딴 남자랑도 만나는 거 같던데?”

“야, 너 정도로 살면 그래도 평균 이상이야. 괜찮아.”


귀가 아플 정도로 내 옆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그놈은 사실 진짜 나, 내 자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다. 냥 말하기 좋아하는 투명인간 정도랄까. 하지만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나 지대하다. 어느 대학을 갈까 결정시키기도 하고 취업의 방향을 설정해 주고 심지어 오늘 점심에 뭘 먹을지, 제육볶음을 한 번에 두 점을 먹어도 될지까지 간섭한다.


책의 주인공 요조는 염세적인 낀자아에게 완전히 종속됐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혐오하는 낀자아를 둔 덕분에 유복하고, 잘 생기고 유머 감각까지 출중했던 자아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불행한 인생을 살기엔 갖고 태어난 자아가 너무 훌륭했다.(그럴 거면 날 주지.)


자신의 인생을 파국으로 몰아치기 직전까지 그는 낀자아의 목소리에 종속되어 살아갔다. 아무 형체도 없고 일말의 죄의식과 책임감도 없는 그놈에게.


세상과 나 사이에 쿠션이 되어주는 낀자아. 그놈이 나쁜 놈만은 아니다. 때로는 나를 향한 무지성의 비난을 혼자 온몸으로 막아주는 담벼락이 돼주기도 하고, 물에 젖은 미역처럼 흐물거리는 자아를 꼿꼿하게 세워주는 응원단장이 되어주기도 한다. 다만 낀자아가 악역을 자처하든 선한 조력자로 다가오든 그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관건이라는 것. 처음에야 낀자아의 목소리에 이리저리 휘둘리기 쉽겠지만 연습하면 조금씨구익숙해진다. 낀자아의 목소리를 흉내 내보면서 나에게 말을 거는 거다. 조금 더 희망이 담긴 씩씩한 목소리로. 결국 오래 살고 그 삶이 종국으로 갈수록 내게 남는 건 나와 그 낀자아 뿐이다. 내 평생을 함께할 친구인 셈이다. 그럼 그 친구를 어떤 친구로 만들어야겠나. 평생 나를 욕하고 내 기를 꺾고 내가 하는 일마다 고춧가루 뿌리는 친구로 둘지, 내가 뭘 해도 나를 지지하는 첫 번째 지지자로 둘지. 선택은 뻔하다.


주인공 요조가 인생에 실격한 건 제 인생의 운전대를 전적으로 미치광이 낀자아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술 마신 사람한테 대리운전을 맡겼으니 결과는 교통사고지 뭐. 지금 이 글을 쓰는 와중에 나에게도 계속 말을 거는 나의 낀자아. 인마 내 말 잘 들어. 넌 내 시다바리다. 어렸을 때부터 쭉. 아페로도 계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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