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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 Nov 04. 2022

걷는 여행 1

모든 건 ‘춘천’ 덕분이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그 이름. 춘천.


우리 부부에게 춘천은 매우 각별한데,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여자와 남자가 호감을 갖기 시작한 이래 두 번째 데이트를 했던 장소라는 상징성 덕분이랄까. 춘천의 공기, 건물, 하늘, 모든 것이 아련하고 아름다운 기억의 조각으로 남아있다.


공지천변에 연보랏빛 저녁노을이 나지막이 내린 모습에 매료되어 눈을 못 떼던 나를 두고 영화 '인터스텔라'의 함의에 대해서, 그러니까 '인터스텔라'라는 영화를 봤지만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를 하지 못해서 "안 본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나의 고백에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한 그가 우주의 기원과 다중우주의 존재에 대해서 쉬운 용어로 풀어 설명해 주던 때, 연보랏빛 저녁노을은 어느덧 짙은 어둠으로 내려앉았고, "아, 그래서 그 마지막 장면이...!"라고 이해가 되던 순간,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할 것만 같다.'라고 생각했다고 하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며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한다고 할까 봐... 이 이야기는 여기 이 공간에서 처음 털어놓는다.


즉, 연보랏빛 저녁노을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서 우리는 한 자리에서 무려 3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었고, 절반 이상은 영화 '인터스텔라'에 대한 해석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지만 대화에 열중한 나머지 시간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와중에 다중우주의 존재와 실체에 대해서 처음 인지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이렇게 마주 앉아 대화를 하는 것도, 춘천이라는 도시에 와서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수만 년 전 어느 시간과 장소에서 있었던 일은 아닐는지 싶고, 이것이 과연 운명이라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후 7년. 다중우주론에 입문하게 해 준 그는 나의 남편이 되었다.




'춘천. 전국의 모든 지역 이름 중에 春 (봄 '춘') 자를 유일하게 사용하고 있다.'는(나묭 작가님의 신간 북토크에서 들은 이야기임을 밝힙니다.) 이 도시가 주는 매력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개인적인 이유에 기인하여 상당히 미화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언제나 춘천은 날씨에 상관없이 '봄날의 햇살처럼' 따사로운 느낌이 도시 전체에 가득했다.


사실, 겨울에 가 본 적이 없는데, 매우 춥다고 들었지만 나의 춘천은 그저 봄춘, 봄이다.




이번 방문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바로, 공유 서재인 ‘첫서재’에 가보는 것. 첫서재라는 공간을 준비하는 과정을 브런치에 올리신 나묭작가님의 글을 보고 브런치라는 공간에 입문하게 되었기에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시간을 못 내다가, 첫서재가 곧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서둘러 춘천행 ITX를 끊었다.


날씨가 기가 막히게 청명했던 가을 주말, 남춘천역에 내리자마자 코끝을 스치는 차갑고 시원한 공기를 가로지르며 우리의 단골 산책 코스인 공지천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마침 점심시간을 딱 맞춰 도착하여 미리 정해 둔 식당에서 가볍게 배를 채우고 커피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해서 나오는데 강원대 정문 너머 언뜻 보이는 교정에 단풍이 한창이었다. 교정을 한 바퀴 돌며 가을 정취에 흠뻑 빠진 상태로 쉬엄쉬엄 걸어서 도착한 육림고개, 그리고 첫서재.

강원대 정문부터 펼쳐진 단풍길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읽고 싶었던 책이 마침 책장에 놓여있어 자리로 가져와서 읽으면서 두 시간 남짓 머물렀는데, 공간의 만듦새, 쓰임새, 차림새 하나하나 단정하고 정성스러웠고, 무엇보다 매우 고요했다. 상상했던 그대로여서 신기했고, 기념 굿즈로 만들어 두신 나뭇결 가죽 노트를 사 오지 않은 것은 큰 후회로 남았다.

다시 문 열어주실거죠. 기다릴게요.

춘천에 마음을 둘 공간이 또 하나 생긴 것 같아서 그저 좋았는데, 문을 닫는다고 생각하니 섭섭함이 한가득이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고 서울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기차가 승강장을 빠져나가는 그 찰나의 순간 늦은 오후의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는 차창 밖의 풍경을 눈과 마음에 담았다.

감성이 한껏 차오르며 오늘의 여행을 복기하다.

가을의 정점에서 만난 춘천,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남편과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브런치에 가입하게 된 것도, 첫서재라는 곳을 마음에 품게 된 것도, 모든 건 ‘춘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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