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서서히 내 세상이 되었다
내가 어느 곳을 향해 가는지도, 이 곳이 어디인지도 제대로 인지하기 전에 너의 모든 것이 나에게 불시에 들어차버렸다. 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 좁은 골목, 매일 일이 끝나면 함께 걷던 거리, 밥을 먹으러 갈 때면 항상 지나던 신호등. 내 옆에 와서 부딪히고 툭툭 건드리면서 놀리는 맛이 있다고 말하던 너, 지하철 역에서 반대 출구로 갈라져야 했을 때 내 머리를 쓰다듬거나 등을 툭 치고 가던 너.
주중에는 매일 한 시간 가량 지하철을 타고 3호선 압구정역에 내린다. 3번 출구로 나와서, 공사 중인 거리를 지나 약 오 분 정도의 시간을 더 걸어가면 아무도 없을 오피스에 들어가 너를 기다린다. 내가 도착하고 약 30분이 지나면 네가 저 멀리에서 넓은 보폭으로 걸어와 힘차게 문을 밀고 들어올 것이다. 가끔은 너와 내가 만나기 전에 카카오톡으로 몇 번의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대부분은 너를 생각하며 노래를 듣고 책을 읽으면서 네가 오기를 기다린다. 문 앞으로 네가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보면서, 가까워지는 너의 묵직한 발소리보다도 내 심장 소리가 더 강렬하게 들려온다. 네가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네가 오는 것을 몰랐던 것 마냥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돌아보고 웃으면서 인사를 건넨다. 그렇게 너도 나에게 가벼운 안부 인사를 전하고, 배고프다고 아기처럼 칭얼대면서 내 옆에 앉아서 컴퓨터를 꺼낼 것이다.
아침은 먹었니, 어제는 몇 시에 잤니 따위의 말을 건네면서도 너를 걱정하지 않은 척, 밤새 너를 생각하지 않은 척하느라 꽤 애를 먹는다. 내 귀가 더 이상 빨개지지 않길, 네가 내 빨개진 귀를 눈치채지 못하길.
네가 온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나면 점심 먹을 시간이 된다. 너는 빨리 점심을 먹으러 가자며 내가 일을 다 마칠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다가 노트북을 닫으면 자리에서 재빠르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난 항상 웃으면서 너를 따라나선다. 그러곤 너는 무엇을 먹을 거냐고 나에게 물어본다. 네가 나에게 그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너랑 먹는 점심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내게 중요한 건 음식이 아닌 사람이었건만 넌 절대 모르겠지.
너와 점심을 먹을 때면 네가 항상 음식을 빨리 먹고 나를 기다린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으면 밥을 잘 먹지 못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시야 안에서 보이면 손이 떨리기 시작하면서 음식을 제대로 집어 먹지도 못한다. 그래서 너와 밥을 먹을 때는 항상 네가 나를 보고 있지 않은 시간이 재빠르게 음식을 입에 넣는 눈치 게임을 혼자서 한다. 한편으론 기다리는 너한테 미안하지만, 한편으론 오피스에 들어가지 않고 온전히 너와 둘이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사실이 좋다. 가끔 오피스에서 밥을 시켜먹는 날이면 너와 밥집을 찾아가는 동안 햇빛 아래에서 걸으며 이야기하는 시간이 없어서, 낯선 공간에 너와 나 둘이서만 테이블을 공유하는 시간이 없어서 아쉽다. 넌 이것도 몰랐겠지.
부서 담당자가 미팅에 가서 없을 때면, 너와 나 단 둘이서 새하얀 오피스에 남겨진다. 너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서서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네가 핸드폰을 보면서 살짝 웃을 때, 컴퓨터에 미끄러지듯 나타나는 한 글자 한 글자에 집중해서 일을 하고 있을 때, 피곤하다는 듯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면서 스트레칭을 할 때, 내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들이 너로 집중된다. 자석에 철가루가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내 생각들은 너에게 철썩 달라붙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너는 내 생각의 중심점이 되어버렸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흘러 어느덧 퇴근 시간인 여섯 시가 다 되어간다. 너는 퇴근 시간 10분 전부터 빨리 가자며 옆에 있는 나를 끈질기게 설득한다. 그러면 나는 항상 마지못해 순응하는 척 가방을 싸고 여섯 시를 조금 남겨둔 시점에서 재빠르게 인사를 하고 오피스에서 빠져나온다. 일을 끝내고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 내 하루 중에서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가장 기분 좋은 시간이다. 네가 내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너랑 같이 카페에 들어가서 잠깐 이야기를 하다가 집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때론 너와 내가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켜놓고 마주 보고 앉으면, 너는 오 분도 채 되기 전에 커피를 다 마시고 얼음밖에 남지 않은 일회용 잔을 책상 위에 돌리면서 내 얘기를 들어주기도 하고, 네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처음 너와 내가 카페에서 이야기를 할 때, 너는 나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싶어 하는 마냥 온갖 질문을 나에게 퍼부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많은 관심을 단기간에 쏟을 성의를 보였다는 사실에 좋았고 놀라웠다.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네가 좋았다. 내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친구들을 가지고 있고 전에 사귀었던 남자 친구들은 어땠는지, 모조리 궁금해했다. 그렇게 나는 무방비 상태로 너에게 아주 조그마한 일부분을 제외한 모든 것을 열어주었다.
너는 편안했다. 처음에 봤을 때부터 폭 눌러앉고 싶게 생긴 안마 의자처럼. 그래서 나는 항상 너에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웃으면서 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칭찬받았다면서 순수하게 기뻐하는 너의 얼굴 표정을 보면서 나도 티 없이 웃어보려고 했다. 너는 나에게 없는 순수함과 철없는 어린 시절의 기쁨이 존재했다. 순수하면서도 성숙했다. 자칫하면 큰 괴리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공존함으로서 너의 가치를 나에게 몇 번씩이고 다시 증명해보였다. 그런 너를 동경했다.
너와 나란히 앉아서 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너에게 온 문자들을 답장하면서 너의 존재를 나에게 각인시켰다. 너는 주로 나에게 뭐 하고 있냐고 물어보았다.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주말에 전화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막연하게 좋았다. 연락이 오는 날이면 네가 내 일상생활 속 함께 있다는 느낌에 항상 나를 괴롭히던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고, 답장이 오지 않는 때면 배가 되어 찾아오는 외로움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렇게 너는 서서히 내 일상 곳곳에 스며들었다. 사소한 추억들이 하나하나 쌓여 일상이 되고 어느새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너는 나에게 하루에 가장 자주 누릴 수 있었던 사소한 행복이었으며,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지루하지 않은 설렘이었다. 너는 내 주중의 웃음이었고, 새벽의 달콤한 상상이었으며, 주말의 설렘과 외로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