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있는 나라에서 산다는 것
신발, 구찌가방, 라이더 재킷, 에코백…
우기가 존재하는 베트남, 그것도 바닷가에서 사는 내가 깜빡 잊고 방치해 둔 사이 곰팡이가 핀 나의 물건들이다.
신발과 에코백은 도저히 구제가 불가능했고, 라이더 재킷은 잘 닦아낸 뒤 바람이 통하는 곳에 며칠간 널어두었다. 그리고 가장 심적 대미지가 컸던 구찌가방은 아주 다행히도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아 공들여 닦아준 뒤 그날 바로 메고 나갔다. 옷장에 넣어두고 메지 않은지 고작 한 달 정도가 지났는데 그 사이에 곰팡이가 피다니 실로 충격과 공포 그리고 절망.. 사실 이 구찌는 아웃렛에서 아주 저렴하게 구매한 제품이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산 명품 가방이었던지라 가슴이 아렸다.
(아래 사진 약혐 주의)
뿐만 아니라 여권, 지폐 등도 눅눅 그 자체. 이번에 출국하면서 신여권을 발급받았는데, 빳빳했던 여권이 서랍에 둔 지 몇 달 만에 눅눅+쪼글해졌다. 제습제를 신발장, 화장실, 옷장, 거실 등 곳곳에 두었지만 큰 의미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집 안 전체가 습하다. 게다가 에어컨 제습 모드를 엄청 돌리고, 날이 좋을 때는 무조건 창문을 다 열고 환기를 시킨다. 그런데도 노답이다. 바다와 가까운 곳일수록 그 습함이 더 심한데, 내가 사는 곳은 바닷가 바로 옆은 아니지만 걸어서 1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인 데다 옥상에서 육안으로 바다가 보이기 때문에 바닷바람의 영향을 아예 안 받는다고는 할 수 없는 곳이다. 거기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방이라 습함이 몇 배는 더 심한 듯하다.
결국 몇 달간 고민하고, 여러 집을 알아본 끝에 월세가 한화로 약 8만 원 좀 더 비싼 남향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 짐이 많은 편이라 이사만큼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아 몇 달간 꾸역꾸역 버텨봤는데, 파우치에 넣어놓고 깜빡했던 보조배터리 충전선마저 곰팡이가 피어있고, 내 피부에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는지라 결국 큰맘 먹고 이사를 결정했다. 몇 주에 걸쳐 눈가, 팔, 허벅지 등에 습진 같은 게 하나둘 생겨버려서 너무 놀랐다. 이곳에는 내가 신뢰하고 갈만한 피부과가 없어 한국에서 사 온 연고를 바르며 나아지길 기다리는 중이다. 이제 우기도 얼추 끝났고, 해가 잘 드는 곳으로 이사도 했으니 삶의 질이 상승하리라 굳게 믿고 있음!
우기를 보내는 동안 가장 그리웠던 건 바로 햇빛 아래 뽀송하다 못해 빳빳하게 마른 수건! 그동안 아무리 말려도 표현할 수 없는 눅눅함이 남아있던 수건들은 이번에 이사하며 싹 다 버렸다. 월세도 올랐고 많은 물건을 못 쓰게 되어버렸지만, 이미 지나버린 일이고 자꾸만 이사를 미루었던 내 잘못이 가장 크기 때문에 남 탓도 할 수 없다. 얼른 잊어버려야지. 우기가 얼추 끝났다는 말을 바로 위에서 했건만.. 낮까지만 해도 좋았던 날씨가 또 변덕이다. 어느새 또 비가 내리고 있다. 대체 이 지긋지긋한 우기는 언제 끝나려나? 그러고 보니 베란다에 빨래 널어둔 거 지금 생각났다. 카페 오면서 세탁기 문도 열어두고 나왔는데.
이럴 때마다 한국의 사계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종종 생각하게 된다.
사실 나는 비 내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빗소리와 비 냄새를 특히 좋아한다.
하지만 비 온다고 좋아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몇 주간 제대로 해를 못 보면 사람이 우울해진다.
그나마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종종 다운되는데, 비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베트남의 우기를 견뎌내기란 정말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기는 지나갈 것이며, 건기가 찾아온 뒤에는 지겹도록 해를 볼 수 있다.
그때까지 조금만 더 견뎌! 버텨!
영원히 지속되는 고난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너무 더워서 빨리 우기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이 글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