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학원이 정말 답일까?
“난 학원 못 끊을 거 같아. 학원에 안 가면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모르겠어.”
지하철에서 본의 아니게 중학생 아이들 대화를 엿들었다.
영어, 중요하다. 대학 입시는 물론 직장 구할 때도 필수다. 학원도 많고 배우는 방법도 다양하다. 아이들은 우리 세대보다 실력이 뛰어나다. 그런데 여전히 영어 공부에 시달린다. 어릴 때부터 놀이 같던 영어는 대입과 취업으로 지루하고 괴로운 과목이 된다.
대입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고 마음이 급해져 득점 요령을 알려주는 학원에 다닌다. 대입 문턱을 넘으면 취업이 기다린다. 토플, 토익 점수가 필요해 또 학원에 다닌다. 직장에 들어가니 영어는 실전인데 의사소통이 안 된다. ‘한 달 만에 영어회화 완성!’이라는 문구가 솔깃하다. 어릴 때부터 시작한 영어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영어 일생을 겪어본 엄마들은 영어가 두렵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아이 영어에 정성이다. '언어는 어릴 때부터 배워야 잘할 수 있다, 초등학교 때 영어를 끝내야 중, 고등학교에 수학, 국어에 집중해서 대입에 성공한다'는 신념이 생겼다. 유명하다는 영어책과 DVD를 사들인다. 영어 유치원에 못 보내면 영어 수업 있는 어린이집이나 영어 학원이라도 보낸다. 학원에는 원어민 선생님이 있어야 하고 현지인 발음 만들어 준다면 비싸도 등록한다. 인기 학원 테스트에 대비해 다른 학원에 보낸다. 하지만 다시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학교 영어수업이 시작되고 대입 영어 학원으로 옮긴다.
선배 엄마들은 말한다.
"영어 유치원? 다 소용없어. 초등학교 3학년에 실력이 같아지더라.”
“이모, 나 영어 잘하지?”
친구 아이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발표를 한다고 했다. 연습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나는 응원하며 “대단하다, 잘했어!”라고 말했지만, 그 순간 마음속에서 뭔가 불편함이 느껴졌다. 아이가 발표한 내용은 너무나도 ‘외운 티’가 났다. 학원에서 써 준 내용이었다. 아이 목소리와 표정은 자신감을 보였지만, 말하는 내용은 기계적으로 외운 문장에 불과했다. 정말 자기 생각이 담긴 말이었을까?
학원비는 비쌌다. 학창 시절 넉넉지 못했던 친구는 아이 공부에 열성이었다. 학원에서 배웠다며 딸 영어 실력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어릴 때와 다름없이 영어 학원에서 반복적으로 외우며 준비를 하는 방식이 과연 아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친구보다 9년이나 늦게 결혼했고 학부형이 되었다. 친한 동네 엄마가 괜찮은 영어 학원에 가보자고 했다. 아이 영어학원을 옮긴다고 했다. 아이가 테스트받는 동안 학원을 둘러봤다. 새 건물에 하얀 대리석 바닥이 반짝였다. 유리벽으로 구분된 작은 교실내부가 보였다. 수준에 따라 반이 달랐다. 소수정예였다. 멋진 교실에서 원어민 선생님과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고급 영어교육 학원이었다.
테스트가 끝나고 원장을 만났다. 명품 옷 입은 원장은 외국에서 공부했다고 소개했다. 테스트 결과 아이는 기초반에 배정되었다. 실망하는 엄마에게 지난 학원에서 어떻게 배웠는지 묻더니 앞으로 열심히만 다니면 영어 실력이 늘 거라고 장담했다. 학원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엿보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겪은 또 다른 이야기는 교통안전 교육을 맡을 때였다. 센터에는 많은 아이들이 방문했다. 영어유치원에서도 견학을 왔다. 한 반은 열 명 안팎이었다. 보통 한국 선생님 한 분, 영어 선생님 한 분이 담임이었다. 교육은 센터 안전선생님이 각 코너마다 설명 후 체험하도록 진행하였다. 특이한 점은, 영어유치원 아이들은 안전선생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국 아이들이라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담임 선생님들이 영어로 지시할 때 반응했다. 한정된 시간에 체험을 많이 시키고 싶은데 영어 설명이 길어 체험 시간이 줄어들었다. 아이들은 조용한 편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떠들고 뛰어다니는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아직 우리나라 발음도 서툰 아이들이었다.
어떤 유튜브 영상에서 원어민 대학생에게 수능 영어 문제를 풀게 했다. 학생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정답을 보고도 이해 못 하는 눈치다. 현지 대학생도 알 수 없는 어려운 문장과 단어를 우리는 몇 년 동안 공부하고 있다. 시험을 위한 영어, 그 영어를 위한 학원으로 내몰린다. 시험 영어는 단어가 어렵고 문장 구조도 복잡하다. 외국인을 만났을 때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정답이 없기에 엄마들은 두렵고, 두려워서 학원에 기댄다. 좋은 학원을 찾아 헤맨다. 영어 유목민이 된다. 하지만 영어라는 언어는 하나인데 학원은 여러 모습이다. 파닉스부터 회화 학원, 입시학원까지. 어떤 학원을 다녀도 영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소통하는 영어와 시험 영어는 두 마리 토끼처럼 닮은 듯 다르다. 뛰어가는 방향도 제각각이다. 방향이 다른 영어가 언젠가 완성될 수는 있는지 궁금하다.
영어 배우는 이유는 뭘까? 현실적으로 대입과 취업을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면 학원 영어도 괜찮다. 내 영어도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내 아이들은 달랐으면 좋겠다. 영어라는 도구를 통해서 세상의 많은 지식과 생각을 만났으면 좋겠다. 단순히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과 소통하고 이해하는 도구이기 바란다. 넓은 안목으로 다양한 시각을 인정하고 통합해서 더 성장하기를 원한다. 이상주의자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몇 만 단어 암기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의 정답 찾는 요령을 배우는 학원에서 영어 완성은 이룰 수 없는 꿈같다. 학원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영어 학원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영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려면 영어를 ‘해야 하는 과제’가 아닌, ‘즐기고 싶은 언어’로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했다. 아이에게 영어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