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표로 죽어라 시켜봐도
퇴근하자마자 큰 아이가 뛰어와 자랑했다.
“엄마! 원어민 선생님이 칭찬 하셨어! 내 발음이 진짜 좋대!”
처음으로 영어가 정식 과목이 되던 초등학교 3학년. 첫 영어 시간에 큰 아이는 선생님 말씀을 다 알아들었다고 했다. 반에서 질문에 답하는 아이가 딱 2명이라고 했다. 아이는 그때까지 공부 못하는 아이라고 스스로 주눅 들었는데 모처럼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아이를 학원 보내기가 그렇게 싫었다. 안 그래도 직장 다니느라 엄마 대신 픽업해주는 수영, 발레, 인라인 학원으로 아이를 돌리는데 학습 학원까지 보내고 싶지 않았다. 신랑이나 나나 학원 제대로 다니지 않고도 대학 나와 회사원으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공부는 학교 공부로 충분하고 아무리 학원에서 배워도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의미 없다 생각했다. 더구나 선행으로 학원에서 배운다면 학교 공부에 흥미가 떨어지지 않나 했다. 그 탓에 첫 아이는 반 아이들이 모두 아는 내용을 혼자 몰랐고 자존감이 떨어졌다. 성적도 그랬다. 엄마 탓이었다.
저학년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는 생각을 할 줄 몰랐다. 그 부분까지 예상하지 못해 미안했다. 하지만 언어만큼은 잘 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우리말과 영어를 올바로 배우면 저학년에 조금 뒤처지더라도 언제든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우리말은 책 읽기, 영어는 듣기와 말하기에 집중했다. 무엇보다 자연스럽고 재미있어야 했다. 특히 영어는 익히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언어다. 어린 아이들이 지속할 수 있으려면 재미가 필수였다.
엄마표 영어가 유행했다. 초등학교 때 영어를 끝내면 중고등학교 때 자막 없이 영화 보며 쉴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관련 책을 꼼꼼하게 읽었다. 엄마 역할이 중요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주제로 수준에 맞는 책과 DVD 찾는 일이 중요했다. 같이 보고 즐기는 역할이 포인트였다.
아이들은 엄마표 영어를 잘 따라왔다. 바쁜 엄마라서 엄마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좋아했다. 유아들이 보는 DVD 몇 개를 가져왔다. 그 중에서 아이들이 직접 골랐다. 처음에는 영어로만 이야기하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때 엄마 역할이 중요했다. 아이들 옆에 앉았다. 나도 뭐라고 하는 지 몰랐지만 재미있다고 박수를 쳤다. 엄마 모습을 보고 아이들도 흥미를 가졌다. 내용은 단순해서 금방 이해할 수준이었다. 캐릭터의 웃긴 표정과 몸짓만으로 재미있었다.
우리는 이 단계를 가볍게 넘겼다. 어렸을 때부터 TV를 보여주지 않아 영상이라면 영어라도 상관없이 즐거워했다. 생각보다 많은 엄마들이 이 단계에서 포기한다. 자극적인 유튜브나 동영상에 노출된 아이는 유아 애니메이션이 유치하다. 더욱이 영어만 나오면 이해할 수 없어 짜증을 내는 아이도 있다. 심지어 영어를 싫어하기도 한다. 이때 엄마가 동요하지 않아야 한다. 엄마가 먼저 재미를 느껴야 아이도 따라온다.
책 읽기는 엄마가 더 노력해야한다. 추천하는 영어책 목록을 들고 도서관에 갔다. 우리집은 세종 국립도서관이 가까웠다. 일반 도서관보다 더 많은 영어책과 음원이 있었다. 동네마다 생긴 작은도서관에도 괜찮은 영어책이 많았다. 인근 대전에는 도서관이 더 많았다. 도서관 마다 인당 5권씩 20권을 빌렸다. 다섯 군데 돌면서 100권을 빌렸다. 목록 따라 책 찾기가 보물찾기 같았다. 책이 가득하면 마음이 풍족했다. 방학에는 도서관 투어를 했다. 도서관 마다 매점과 식당 들르는 재미가 추억이 되었다.
빌려 온 책은 모두 꺼내 책상이나 거실 바닥에 책탑을 쌓았다. 아이들이 각자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골랐다. 빌린 책을 모두 읽게 강요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이미 본 DVD와 내용이 같은 책을 골랐다. 익숙해서 좋아했다. 딸려 있는 오디오 CD를 틀어 원어민의 목소리를 들으며 책을 보았다. 모르는 단어라도 일일이 알려주지 않았다. 아이가 재미있으면 그만이었다.
아이는 몇 개월 만에 혼자 영어 그림책을 읽었다. 많이 들었던 CD 목소리대로 따라 읽었다. 한 페이지 다섯 줄, 스무 장 넘는 책이었다. 엄마가 좋아하니 신나서 소리 내어 읽었다. 발음이 원어민 같았다. 언어 신동인줄 알았다. 신기해서 녹화도 했다. 해석을 해준 적도 없는데 내용을 다 알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사춘기 아이와 함께 팝콘을 먹으면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자막 없이 보는 날을 꿈꿨다.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새로운 난관에 부딪쳤다. 이상하게 초등학교 3학년이 읽을 만한 영어 원서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 또래 아이들이 영어학원 공부로 원서 책 수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도서관이든 서점이든 학습용으로 생각되는 책만 보였다. 내가 봐도 지루했다. 재밌고 신나는 유아용 영어 동화책을 읽다가 갑자기 그림 몇 개 없는 무채색 책 단계로 넘어가기 어려웠다. 중간 단계에서 읽을 책이 없었다. 또래 아이들이 신나게 읽을 만한 그림 많고 글도 많은 재미있는 책이 없었다. 학교, 학원 영어책 말고는 읽을 책이 없었다. 끊어진 황금색 길을 본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 일행의 기분이 이랬을까.
그때 꿈꿨다. 영어권 나라에서 현지 아이들이 즐겨보는 책을 마음껏 읽히고 싶다고. 꿈을 꿨더니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