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인터뷰] 12년간 한 소년을 연기하며 자란 배우의 ‘졸업식’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알런’과 작별하려고요.”
지난 12년 동안 연극 <에쿠우스>의 ‘알런 스트랑’을 살아온 배우 김시유는 담담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대 위의 그는 언제나 17세였다. 여전히 해사한 소년 같은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지만, 현실의 시간은 흘러 그는 어느덧 30대가 되었다.
이제 그는 ‘알런’이라는 자아에서 ‘졸업’을 준비한다.
오래된 꿈에서 천천히 눈을 뜨듯이.
“<에쿠우스> 오디션에 합격했던 게 2014년 초였어요. 그때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패기 넘치는 20대 초반의 신인 배우였죠.”
이제 김시유는 알런을 오래도록 지켜온, 믿고 볼 수 있는 배우가 되었다.
영국의 극작가 피터 섀퍼의 대표작 <에쿠우스>는 6마리 말들의 눈을 찔러 실명시킨 소년의 충격 사건을 통해 인간의 욕망·신성·광기를 탐구한다. 한국에서는 1975년 막을 올렸으며 반세기 동안 상징적인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가 작품을 처음 만난 건 19세, 연극학과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는 그저 ‘광기의 겉모습'을 흉내 낸 거였어요. 나름 노력을 하기는 했지만 알런 내면의 고통에는 도저히 닿지 못했죠.”
그러다가 알런 역의 언더스터디(대체 배우)로 팀에 합류하며 작품 전체를 마주했을 때, 그는 압도되고 말았다. 63페이지 대본의 밀도, 선배 배우들의 존재감, 그리고 스스로의 부족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래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연습이 끝난 뒤에도 막차 시간까지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해보는 런(run)을 매일 혼자 돌곤 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대역으로 대사 합을 맞추게 됐는데, 알런의 아버지 역을 맡으신 유정기 선생님께서 ‘지금까지의 연습 중 오늘이 가장 강렬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이후 여러 번의 도전을 거쳐 2019년 지방 공연과 2022년 서울 충무아트센터 공연을 통해 그는 마침내 ‘시유 알런’을 세상에 선보였다.
흔히 말하는 ‘세대교체’ 때문이 아니라고 그는 단호히 말했다.
“30대 후반까지 알런을 선보였던 지현준 선배님은 제가 본 중 순수함을 가장 잘 표현해 낸 알런이었어요.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무대를 바라보는 시선이에요."
실제로 이번 시즌에서 알런을 맡은 이충곤, 정용주, 도은우 배우 역시 자신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는 않는다고 그는 설명했다.
“12년 전의 저는 맹목적이었고 오로지 열정 하나로 버텼어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시야도 넓어지고 경험도 깊어졌어요. 배우로서는 분명히 성장했어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익숙함의 함정’을 느꼈다.
“어느 순간, 애쓰지 않아도 내가 곧 알런이 되어버린 듯했어요. 곧바로 ‘이건 위험하다’고 생각했죠. 배우가 인물을 다 안다고 믿는 순간, 탐구는 멈추니까요.”
그는 <에쿠우스> 같은 고전일수록 과거의 틀에 갇히지 않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연극은 본질적으로 ‘미완(未完)의 예술‘이에요. 어떤 형식도 해석도 절대적인 건 없죠. 매번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다시 태어나야 해요.”
그렇게 지난 12년 동안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알런을 상상하고 실험해 온 그는 이번 시즌에 ‘더욱 본능적이고 가장 원초적인’ 알런을 제시했다.
“마지막인 만큼 작품의 핵심으로 더 깊이, 끝까지 파고들고자 했어요. 알런이라는 또 다른 나를 떠나보내면서 그 어떤 후회도 남지 않게 불태우고 싶었죠.”
이번 시즌은 특히 배우의 정신뿐 아니라 몸의 한계까지 시험한다.
“원래 <에쿠우스>는 신체적 긴장감이 팽팽하고 움직임도 격한 작품이에요. 알런 역의 배우들은 온몸에 멍이 드는 건 일상이고, 부상도 흔하죠.”
오랜 세월 태권도로 단련된 몸을 가졌지만, 그 역시 매 공연마다 근육통과 몸살, 상처를 피할 수 없었다.
“공연 직후에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집에 돌아와 욕실에서 뜨거운 물을 맞으면, 따끔거림이 한꺼번에 몰려와요. 그제야 ‘아, 오늘 또 다쳤구나’ 하죠. 그래도 알런에게 미안해서라도 몸을 사릴 수는 없어요. 그 아이가 느끼는 격정과 공포 앞에서 배우인 내가 뒷걸음질 치면, 그건 거짓이 되잖아요.”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꾸준히 달리기를 한다. 다만, 알런은 작품에서 ‘볼이 움푹 파인’ 소년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근육을 키우는 웨이트 운동은 줄였다.
“극 중에 노출 장면이 많다 보니까 체지방 감량 목적이라고 생각들 하는데, 그보다는 무대 위에서 버틸 근력이 절실히 필요해요. 기운이 부족하면 해낼 수 없는 역할이라서 끼니는 일부러 든든하게 챙겨 먹고 있어요.”
무대에 오르기 전에도 늘 같은 루틴을 지킨다.
“<에쿠우스>를 하면서 생긴 버릇이 있어요. 공연 전에는 모든 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반드시 한 번씩 훑어봐야 해요. 매 회차마다, 시즌의 마지막 날까지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어느 순간부터 그 ‘당연함’이 사라질 때가 있거든요."
공연 전의 배우가 대본을 통째로 보는 것은 단순히 내용을 암기하거나 복기하려는 게 아니라 그날의 흐름을 몸과 공간에 새기는 의식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모든 대사를 읽어보고 혼자서라도 런(run)을 돌아본 후에 대본을 덮어야, 그제야 안심하고 무대에 올라갈 수 있어요.”
이번 시즌에 알런을 선보이는 이충곤, 정용주, 도은우 배우들도 각자의 결이 뚜렷하다. 김시유는 이충곤 배우는 ‘솔직한 알런,’ 정용주 배우는 ‘자유로운 알런’ 그리고 도은우 배우는 ‘정직한 알런’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김시유만의 알런’을 명확히 갖고 있다. 이런 그의 개성은 주요 상대역인 말 너제트, 그리고 정신과 의사 마틴 다이사트와의 합에서 드러난다.
“저와 말들과의 관계는 본능에 가까워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리드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충동이 치열하게 얽혀요. 내 안에서 터지는 에너지를 (말 너제트 역을 맡은) 김명준 배우가 야성으로 받아주죠. 작품 속 알런과 너제트의 관계 그대로예요.”
알런과 다이사트 간의 감정과 관계 변화 역시 극을 끌고 가는 중심적인 축이다.
이번 시즌에서 다이사트 역은 장두이, 최종환, 한윤춘, 3명의 중견 배우가 맡아서 각기 다른 존재감으로 무대를 채운다.
“예를 들어, 한윤춘 선배님은 알런이 악몽을 꾸거나 방에 웅크리고 있을 때, 대사를 건네기 전에 잠시 알런을 고요히 바라보세요. 저는 그게 한윤춘 선배님의 다이사트, 그의 진심이라고 느껴요. 객석에서는 각도상 볼 수 없지만 그 찰나의 눈빛에 알런으로서의 제 마음이 공명하는 거죠."
“알런은 제 안에 남겠지만, 이제는 그 껍질을 벗어야 해요. 한 인물을 너무 깊게 오래 품으면, 배우로서 다른 얼굴을 잃을 수도 있거든요.”
올해 그는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 중증장애 아들을 둔 아버지의 이야기 <킬미나우> 등 다양한 무대에 섰다.
“<킬미나우>의 조이도 17세예요. 알런과 동갑이죠. 두 인물 모두 고통 속에서 스스로 성장의 방식을 선택한다는 점이 닮았어요. 알런이 폭발하는 에너지라면, 조이는 고요하게 삼키는 에너지예요.”
이렇게 매번 다른 인물로 무대에 존재했다가 빠져나오기를 반복하면서 그는 연극이 ‘살아 있는 언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배우의 몸 상태, 상대역과의 합, 관객의 반응에 따라 매 공연이 달라요. 모두가 함께 그날의 이야기를 만드는 거죠.”
하지만 막이 내리고 나면 어김없이 공허함이 찾아온다.
“강렬한 공연을 마치고 나면 그날 밤에는 흥분감에 쉽사리 잠들지 못해요. 하지만 불이 꺼진 극장 근처를 지나가다 보면 무대의 시간은 어느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걸 느끼죠. 매번 겪어도 이 공허함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아요. 그래도 다시금 무대로 돌아가고 새로운 작품 세계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게 연극의 힘이에요.”
“사실 원래 꿈은 영화배우였어요. 계속 오디션에 떨어지다가 합격한 것이 <에쿠우스>였죠. 간절하게 연기를 하고 싶던 저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이 바로 연극이에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감사와 책임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주어진 작품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역할이 커지고, 관객의 흐름을 읽고 무대를 주도해야 하는 자리까지 오게 됐죠. ‘이 역할은 김시유 배우가 해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듣게 되면서, 신뢰만큼 책임감도 커졌어요.”
그로 하여금 다시금 중심을 잡게 해 준 것은 최근에 참여한 <벚꽃동산>이었다.
“문삼화 연출님께서 ‘시유야, 몇 년 사이에 단단함이 줄고 잔기술이 늘었네’라는 뼈 있는 한 마디를 던지셨는데 그 울림이 정말 컸어요.”
보여주기 위한 불필요한 움직임은 빼고, 단단하게 서있는 모습에서부터 의미와 진심을 담아내야 한다는 이른바 ‘연극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연극인으로서 <에쿠우스>와 함께한 지난 12년, 그리고 앞으로의 12년을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배우로서 희소성이 있었으면 해요. 한 인물에 머무르지 않고, 매번 다른 얼굴로 관객을 만나고 싶어요. <에쿠우스>를 ‘졸업’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에요.”
“내년부터는 새로운 무대에서 다른 모습으로 서겠죠. 그래도 20대 초, 그때의 알런처럼, 여전히 뜨겁게 숨 쉬는 배우이고 싶어요. 그게 제 다음 12년을 위한 연습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