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 대하여_Prologue
베를린을 처음 방문한 건 2014년 여름이었다. 70여일의 유럽 배낭여행을 계획하며 미처 일정에 담지 못한 독일을 어떻게든 담아보려는 심보로 베를린 워크캠프를 신청했고, 그렇게 유럽여행의 마지막 2주일을 베를린에서 보내기로 정했다.
베를린의 첫인상은 엉망이었다. 프라하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4시간쯤 달려 베를린 중앙역에 도착했을 때,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도시의 건물들은 먹구름처럼 온통 회색빛이었다. 몇 주 전 스위스 루체른에서 폭우를 피해 독일 뮌헨에 잠시 머물렀었는데, 이 날은 반대로 독일에서 폭우가 쏟아졌다. 게다가 중앙역 코 앞에 있는 숙소를 찾는다는 게 지도를 잘못 보는 바람에 20kg의 캐리어를 끌고 1시간 가량을 걸어야했고, 호스텔에서는 체크아웃하는 사람들과 차례가 섞여 방열쇠를 받기까지 하세월이었다.
다음날 날씨는 여전히 축축했지만 워크캠프 숙소가 위치한 근교의 Grünau로 향하면서, 조금씩 새로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철 창문 밖으로 색색의 건물들이 보였고, 도시 중심부를 벗어난지 얼마 안돼 나무들이 우거진 숲이 나타났다. Grünau역에서 내려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노란색 전차를 타고 나무들 사이를 지났는데, 그 풍경이 마치 '이웃집 토토로'의 집으로 향하는 것마냥 생경했다. 정류장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강가 바로 앞에 숙소가 있었다. 3~4명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방갈로들이 서로 조금씩 거리를 둔 채 흩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에 커먼룸으로 쓰이는 방갈로의 큰 창으로 강이 바로 바라다 보였다. 이 날은 비가 와 강에 아무도 없었지만,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수영하는 사람들, 보트 타는 사람들, 심지어 조정 연습을 하는 학생들까지, 시원한 여름 풍경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숙소가 베를린 근교에 있다는 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숙소와 베를린 도심 사이는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의 거리로 조금 멀었지만, 덕분에 나는 베를린의 자연과 도시를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만약 한 쪽만 경험했더라면 이만큼 베를린의 매력에 빠질 수 있었을까?) 특히 내가 신청했던 워크캠프 프로그램은 자유 시간이 많았고, 프로그램 리더이자 베를린 토박이인 Mado는 베를린의 유명한 관광지부터 골목골목 숨겨진 장소들까지 모두 데려가 주었다. 슈프레 강을 빌려 만든 해수욕장 카페 Jaam에서 쬐던 햇빛. 산책길에 지난 Hackescher Markt 바에서 추었던 탱고. Mauerpark 플리마켓 잔디밭에 펼쳐진 오픈에어 가라오케와 버스킹 공연들. 대형마트 옥상에 거짓말처럼 나타난 카페 Klunker Kranich의 도시 뷰와 라이브 재즈공연. Tempelhof 공항에서 신나게 달리던 자전거. 강가로 떠난 주말 피크닉과 강가에서의 보트레이스.
런던에서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모험을 경계했던 나는 베를린에서 마음을 열고 내 앞에 놓인 자유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여행하는 2달 동안 여러 도시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삶을 만나며, 새로운 것에 벽을 치고 외면하기보다는 기쁘게 마주하고 살피는 법을 알게된 덕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를린에는 누구든 무장해제시킬만큼 자유의 분위기가 충만했다.
누구나 졸업과 취업을 생각하는 4학년 1학기였기에 무작정 베를린으로 간다는 게 부담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지금이, 내 인생에 베를린이 필요할지 혹은 그렇지 않을지 판단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2년 전 한국으로 돌아와서 항상 마음 한켠으로 막연하게 베를린을 생각했다. 강렬하고 분명한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지하철역에서 한참을 들었던 이름 모를 이의 기타연주처럼 소소한 일상의 이미지들에서 다른 곳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특별함이 느껴졌다. 배낭여행 중 그 어느 도시보다 오래 머물렀기에 느꼈던 친근함 때문인지, 혹은 한참 곳곳에서 예술가들이 모이는 시기에 만들어졌던 힙함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유야 뭐가 됐든, 나는 내가 왜 이 도시에 빠져들었는지 그리고 다시 방문한 후에도 이 도시를 사랑할 수 있을지 알아내고 싶었다. 게다가 당시 한참 공부하던 '도시재생'과 '커뮤니티'라는 화두에 베를린이 있었으니 더더욱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침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여름학교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교내 프로그램이 있어 베를린에서 1달을 머물게 되었고, 나는 내 마음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로또 당첨, 사업성공의 기회,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처럼 일생일대의 기회 혹은 삶을 대하는 자세를 180도 바꾸어주는 전환점이 있다면, 나에게는 내가 사랑하는 도시, 베를린과의 만남이 그런 인생의 행운이다. 내가 살고싶은 삶의 모습이 있는 곳이자, 내가 사랑하는 자연과 예술이 모두 모여있는 곳.
2016년을 마지막으로 나는 아직 베를린에 가지 않았고, 앞으로 정해진 계획은 아직 없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도 흐뭇해지는 추억과 나를 가슴 뛰게 하는 내일의 버킷리스트가 있음에 마음이 든든하고 앞으로가 기대된다.
그 설렘과 기쁨을, 그리고 무엇보다 베를린의 자유를 모두와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