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끝에 낙이 온다
<2024년 07월 09일>
AM 07:00
( 삐비비빅)
아침 일찍부터 스텔라의 핸드폰 알람이 울려댄다.
평소에는 새벽 늦게까지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그녀가 오늘은 제주도로 온 이래 가장 일찍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흰색과 남색이 배색된 배낭에는 오이, 350ml의 작은 스포츠 물병과 방풍, 방수 소재로 제작된 밝은 하늘색의
헬리움 레인 자켓을 넣고, 선글라스와 선크림도 넣는다.
대용량의 물병을 챙기면 배낭이 무거워지고, 작은 물병을 챙기는 대신 수분이 풍부한 오이를 챙기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걸 아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주말마다 하던 취미가 등산이며, 얼마나 많은 등산 경험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제주도에 가져갈 짐을 쌀 때부터 한라산 등반을 계획하고 등산복과 등산용품을 챙긴 그녀는 검은색 페로시 팬츠와 흰색 반팔 티셔츠를 매치해 입고는
캐리어에서 모자와 트레킹화까지 꺼내 착용한다.
그녀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착용한 후, 자주 듣던 팝송을 들으며 펜션을 나섰고, 올레길 3 코스의 시작 지점인 온평 포구는 올 때 남아있을 체력을 감안해
택시로 이동한다.
3코스는 난이도 '상'의 해당하는 코스로, 온평 포구를 조금 지나서 3-A 코스와 3-B 코스, 두 개의 코스로 나누어지고 신풍교차로 인근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2개 코스로 운영된다
3-A 코스는 중산간 길에서 만나는 오래된 제주의 돌담과 울창한 숲,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지나가며 제주의 고즈넉함을 만끽할 수 있는 코스로,
총거리 20.9km에, 소요 시간은 6시간이 걸리는 구간이며, 3-B 코스는 초록의 바다와 초록 평원이 끝없이 펼쳐지는 유일하게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해안을 따라 걷는 코스로, A 코스 보다는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올레길이 처음인 사람들도 선택하는 구간이고, 총거리는 14.6km에,
소요 시간은 4시간이 걸린다.
제주 바다를 마음껏 만끽하려면 3-B 코스를, 중산간 길의 고즈넉함과 용눈이오름을 사랑했던 두모악의 감동을 원한다면 3-A 코스를 권한다는 리뷰를 보고
스텔라는 애초에 해안을 따라 걷고 싶었던 마음 그대로 제주 바다를 만끽하기 위해 3-B 코스를 선택했다.
온평 포구 올레길 3코스 시작점에 도착한 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첫걸음을 내딛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으며, 조용히 자연을 느끼며 걷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 점이 마음에 들었고, 일찍 출발한 보람을 느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제주의 전통 등대인 도대가 나오는데, 해 질 무렵 뱃일 나가는 어부들이 생선 기름 등을 이용해 불을 밝히고,
아침에 돌아오면 그 불을 껐다고 한다.
올레길 왼쪽으로 제주의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고, 온평리 바닷길은 세찬 바람만 없다면 편안하게 산책하듯 걸어가면 되는 길이며,
도보 여행자 모두를 기꺼이 품어주는 듯하다.
둥글게 돌을 쌓아 고기를 잡았다는 돌 그물 원담이 보이고, 인위적으로 만들었지만, 자연의 맛과 멋을 최대한 살려내어 곡선의 아름다움을 물웅덩이로
표현한 것이 걸음을 멈추게 했으며, 멈춘 김에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니, 되돌아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풍경들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멀리 보이는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가 아지랑이처럼 회색의 세상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듯했고, 마치 한폭의 동양화처럼 운치 있는 풍경으로 다가온다.
온평 포구에서 시작한 길은 신산바다 환해 장성길로 이어져 길은 평탄했으며, 바다에는 거세지 않은 잔잔한
파도가 춤을 추고 있고, 3km 표식과 함께 보이는 환해장성은 제주도의 해안선을 따라 쌓은 석성으로,
고려 때 몽골군에 항거하는 삼별초 군이 제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고려조정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환해 장성길 신산리 바다에는 한여름에도 5분 이상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차가운 용천수가 있는데, 예전에는 사람과 말이 함께 먹고 마셨다는 용천수는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변함없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스텔라는 갈증을 느끼고는 배낭에서 지퍼백에 담아 온 오이를 꺼내, 반을 뚝 잘라 먹으면서 걷는다.
신산리 해안도로를 따라 대나무 숲길과 오솔길을 지나, 올레길이 계속 이어지더니, 어느 작은 어촌 바닷가에 갑자기 나타난 잔디밭이 작은 아름다움을 더 했으며,
중간 스탬프 지점인 신산리 마을 카페에 도착했다.
제주 올레길 1코스부터 마지막 27코스까지 중간중간 지점마다 스탬프를 조형물 안에 숨겨두었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어가며
걷듯이 제주 올레길에서도 첫 지점에서 구입한 패스포트에 각 지점마다 스탬프를 찍고 마지막 지점까지 완주하면 제주 올레 완주증을 수여하는 시스템인데,
스텔라는 전체 코스 중 세 개의 코스만 걸을 예정이어서 중간 스탬프 지점들을 사진 찍는 걸로 만족한다.
신산리 마을 카페에서 쉬어가기로 한 스텔라가 매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입구의 왼쪽으로는 제주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되어 있고,
그 앞에는 바다를 바라보며 음료를 마실 수 있도록 끝에서 끝까지 이어진 긴 테이블과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카페 내부는 단조롭고 깔끔한 인테리어로, 녹차로 유명한 신산리인 만큼 벽마다 신산리 녹차를 소개하는 안내문이 걸려있으며, 신산리 녹차는 떫고 쓴 맛이
덜하고 부드러운 목 넘김과 입 안에 맴도는 달달한 맛이 특징이라고 하니, 그녀도 얼른 맛보고 싶어졌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좀 전에 봤던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긴 테이블 자리가 전부가 아니라 안쪽에 더 넓은 공간에 큰 소파가 있어, 생각보다 더 넓고
큰 규모의 카페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지난 2014년에 생활권 선도 사업으로 제주 올레길 주민 행복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마을 카페 시설로,
날씨가 좋으면 신산 앞바다의 돌고래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녀는 추천 메뉴인 녹차 아이스크림과 녹차 라떼를 주문했고, 해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걷다 보니, 출발 지점으로부터 2시간 반 정도 지난 상태지만
아직 점심시간 전이어서 그런지, 내부는 한산했으며, 제주 바다가 보이는 앞쪽 창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녹차 아이스크림과 녹차 라떼가 나왔고, 유독 날씨가 좋아서 멋진 하늘과 제주 바다의 조화를 감상하며 신산리 녹차가 차가운
아이스크림과 따뜻한 우유가 만나 한층 더 부드러웠다.
특히, 아이스크림은 신선리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만들어, 유화제와 증점제, 안정제와 같은 식품 첨가물이 들어 있지 않고 원재료만으로 만든 수제 아이스크림이라
일반 소프트아이스크림과는 확연히 다른 맛이었다.
달콤했던 잠깐의 휴식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오자,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기 전까지도 살랑이던 바람이 바다를 건너 강하게 불어왔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이
더뎌질 정도였고, 아쉽게도 돌고래는 볼 수 없었다.
다시 주어동 포구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는 스텔라
신산해안로 아래 현무암을 뚫고 내만의 여 형태 부정형의 어장을 만들었는데, 물이 들고 나는 입구를 막아 투망으로 농어를 잡았다고 전해지는 농개(농어개)를
들여다보니, 잘게 부서지는 파도가 보인다.
들리는 건 오직 바람과 파도 소리 뿐, 인기척조차 없는 삼달리를 따라 걷다 보면 길옆 초록 잔디 향이 코끝을 스치고, 보이는 건 오직 바다와 검은 현무암 그리고
몇 개의 펜션과 식당 한 곳, 그리고 몇 가구 되지 않은
작은 마을이 전부였으며, 길은 세월을 따라 변한다고 하지만 삼달리 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처음부터 있었던 그대로의 길처럼 느껴진다.
신산리 앞 바닷가는 인적이 별로 없어, 고즈넉하게 걷기 좋았고, 바닷물이 빠져나간 암석 위에는 하얀 소금 결정이 생기는 곳도 있었으며, 삼달리 어촌계를
지나 신풍리 어촌계가 있는 지점에 도착했다.
온평 포구를 지나 갈라졌던 A 코스와 B 코스가 다시 만나는 지점이며, 넓은 초원이 나올 때까지 걷다가, 8.6km 표식을 지나면 성산읍에 자리한 신풍 신천
바다목장이 나온다.
예전에는 말 방목장으로 쓰이기도 했다는데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약 10만평 규모를 자랑하며, 지금은 소를 방목하며 키우는 곳이고,
신풍리와 신천리 바닷가에 자리한 목장은 바다와 밀접해 있어, 파란 바다와 초록 목장이 어우러진 특별한 풍경은 오직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신풍 신천 바다목장 끝, 올레길을 지나, 이름 없는 신천리 바닷가 옆 돌길로 향해 조금 걷는데, 양옆으로 노란 풀잎들이 바람에 눕고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는
노란 애기똥풀이 다리를 스치고, 이내 다시 바닷가 옆 찻길을 걷는다.
10.6km 지점을 지나니, 신천리 방파제가 나오는데, 세 가지 색깔의 등대가 한곳에 있어, 이색적이다.
조금 더 걸어가면 배고픈 다리가 나오는데, 고픈 배처럼 밑으로 푹 꺼진 다리 모양 때문에 이름 붙여진 배고픈 다리는 한라산에서 흘러와 바다로 이어지는
천미천을 가로지르는 꼬리 부분에 놓여 있다.
해녀들이 물질하다 겨울철에 불을 피워 언 몸을 녹이며 쉬는 장소라는 '불턱여'라는 곳도 보이고, '놀멍 쉬멍 갑서'가 새겨진 큰 표지석을 만나면 이제 남은
거리는 2km라는 의미이며, 놀멍 쉬멍 갑서는 '놀며 쉬며 가세요' 라는 뜻으로, 올레길 걷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며, 놀면서 쉬면서 천천히 제주를 즐기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천미천을 건넌 올레길은 성산읍을 지나 이제 서귀포시 표선면으로 들어간다.
표선 소금막 해변과 검은여 백사장은 같은 장소 같은 명칭인데, 검은여 표선해수욕장 동쪽은 작은 백사장, 사구를 조금 더 지나면 나타나는 서쪽 해수욕장은
큰 백사장으로 불리며, 표선해수욕장 하면 큰 백사장을 말한다.
검은여에서 보이는 표선과 사구 언덕 너머에서 보이는 표선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오고, 바닷물 경계로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드넓은 백사장이
둥글게 펼쳐져 있으며, 바다와 경계를 이루는 해변 길이보다 뒤쪽에 펼쳐진 백사장 둘레가 10배는 될 듯하다.
백사장을 둥굴레 돌아가는 주변은 울창하진 않지만, 키 낮은 숲이 해안을 감싸고 있어 바람을 막아주는 명불허전 '명품' 해수욕장이다
제주 올레길 3코스는 표선백사로를 따라 야영장을 지나서 제주 올레 4코스 공식 안내소를 만나면, 총 4시간이 걸린 그녀의 첫번째 올레길 도보여행도 끝이 났다.
오늘은 첫날이었기 때문에 내일 하루는 쉬고, 11일에는 올레길 4코스, 12일엔 6코스를 걸을 예정이며, 3코스 도착 지점이자, 4코스 시작 지점인
표선해수용장에서 택시를 타고 펜션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그녀는 올레길을 걷는 동안 느꼈던 것들을 다시 떠올려 본다.
서울에서의 일상에서 벗어나 제주의 자연 속을 걸으며 마음을 정화하고 새로운 에너지와 영감을 얻어, 시나리오 작업에 접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낯선 길을 걷는다는 건 오감을 충족한다는 걸 느꼈고, 서울로 다시 올라간 후에도 길이 그리워지면 슬며시 꺼내, 오늘과 남은 이틀 동안 걷던 제주 올레길을
떠올리며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스텔라는 앞으로 남은 이틀의 올레길 도보여행에 기대감이 높아졌다.
펜션으로 돌아온 그녀가 거실의 시계가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다는 걸 확인한 후, 땀을 흘렸던 찝찝함에, 배낭만 바닥에 벗어두고는 1층 거실에 있는 욕실에
바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왔고, 소파에 그대로 누웠다.
피곤함에 금방 설잠이 들어버린 그녀가 눈을 뜨자, 시곗바늘은 어느새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저녁은 간단히 컵라면으로 때우기 위해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는 아일랜드 식탁 한 켠에 미리 사둔 컵라면을 뜯는다.
4시간을 걷고 나서 먹는 컵라면은 스텔라의 피곤함을 풀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