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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지 Jan 18. 2020

'자기만의 방'만큼이나 필요한 건

여성 예술가들이 하루를 보내는 방식,『예술하는 습관』


미국문학사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자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해리엇 비처 스토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글을 쓰려면 나만의 방, 내 방이 있어야 해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보다 이미 백 년 가까이 앞서서 한 얘기다. 여자가 글을 쓰려면 방뿐만 아니라 돈도 필요하다는 울프의 에세이는 페미니즘은 물론 글 쓰기 책에도 자주 인용되어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여성의 지위는 울프가 살았던 백 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지만 아이들 키우는 엄마에게 자만의 공간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만약 자기만의 방이 생긴다면 그 후는 어떨까? 생계가 해결되고 공간이 허락한다면 글을 쓸 수 있을까? 꿈꾸는 작업실은 아니더라도 밖으로 눈을 돌리면 예전보다 글을 쓸 수 있을 만한 장소가 늘어났다. 노트북이나 아이패드, 블루투스 키보드를 지참하고 카페나 도서관에 자리 잡아 이어폰을 끼면 그곳은 얼추 나만의 공간이 된다. 돈이 들고 오가는 행인들로 소란스럽고 만석일 때도 있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이동식 집필실인 셈 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 학교에 가게 되면서 나에게도 여유 시간이 생겼다. 등교한 후 부지런히 움직여 정리를 마치면 집 앞 도서관이라도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주부의 일은 아이 돌보는 것만이 아니었다. 잡일이 끊이지 않고 만나야 할 사람, 다녀와야 할 곳도 많았다. 몸과 마음이 지치면 쉬어야 하니 짬 나면 가장 하고 싶었던 독서나 글 쓰기는 뒷전으로 밀렸다. 원하는 일을 할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고 난 후 생기는 다음 문제는 확신, 의지, 에너지 배분이었다.


2020년 1월, 노들서가 집필실 10번 자리를 배정받고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명패에는 자랑스럽게 "OOO 작가"라고 쓰여 있건만 나는 작가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글을 써 본 적 없는 아무개일 뿐이다. 집필실을 원했던 이유는 공간도 탐이 났지만 무엇보다 다른 작가들은 무엇을 어떻게 쓰는지 궁금해서였다. 어떤 자세로 얼마나 오랫동안 어떤 도구로 작업하는지 관찰하고 배우고 싶었다.


때마침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의 자세와 습관을 배울 책도 만나게 되었다. 걷는나무의 『예술하는 습관』 은 분야에서 인정받은 여성 예술가들의 하루 일상을 요약해 어떤 습관을 갖고 작업에 임했는지 소개다. 저자 메이슨 커리는 2011년 비슷한 내용의 책 『리추얼』을 펴낸 바 있다. 수록된 161명 중 여성 비율이 너무 적었던 점이 아쉬워 이번에는 뛰어난 여성 예술가들 131명의 성취와 작업을 수집해 출간했다고 한다.


작가들기벽있는 특이한 이들일 거라 한동안 오해했다. 불우한 시기를 보내고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들이 떠올라서였다. 김소월이나 헤밍웨이나 버지니아 울프 같은 이들 말이다. 위대한 천재 작가일수록 극적인 삶을 사는가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다수의 작가들은 오히려 짜인 일과표에 따라 생활하며 일정 시간 글을 쓰거나, 하루 작업량을 정해 두고 분량을 채우지 못하면 자신을 채찍질하는 특별히 성실한 이들이었다.


의외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예술가들이 많았다. 아침형인지 저녁형인지의 차이는 있었지만 같은 시간에 먹고 작업하고 산책했다. 생활은 단순하게, 마음은 평온하게 유지하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확보하고자 했던 그들은 똑같이 주어지는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에너지를 어디에 배분할지 조절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항상 아침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글을 쓰고 진행 상황을 일기에 기록했다고 한다. 도리스 레싱의 하루 목표는 최소 7000 단어였는데 아이를 키우면서도 목표를 채웠고 뉴질랜드 작가 재닛 프레임 역시 목표 분량과 완성 분량 등 집필 과정을 매일 남겼다.


지나치다 싶은 작가들도 있다. 수전 손택은 글을 쓸 때 마약의 일종인 스피드를 먹었다.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20시간 동안 앉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감 시한까지 미루압박감을 높인 상태에서 글을 쓰는 일이 잦았다. 며칠 동안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집필에 몰두하다 담뱃불도 붙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열 살짜리 아들이 다가와 그에게 담뱃불을 붙여 준 적이 있다고 한다. 미국의 극작가 릴리언 핼먼은 하루에 담배 세 갑을 피우고 커피 스무 잔을 마셨다지만 이런 건 따라 하면 안 되겠다.


집안일과 창작 활동을 병행해야 했던 여성 예술가들의 하루는 닮은 듯 달랐다. 나도 나만의 시간 활용법과 글 쓰기 습관을 찾게 될까? 가족에게 소홀하지 않고 머무를 수 있을까? 아직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너무 적은데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면 그건 욕심이 아닐까? 영국의 화가이자 조각가 매기 햄블링은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올바른 상태가 되는 게 어렵다"** 했다. '자기만의 방' 만큼이나 필요한 건 올바른 하루를 보내고 매일을 쌓아 올려 최적의 결과를 얻는 것일 테다.




* 메이슨 커리, 『예술하는 습관』, 이미정 옮김, 걷는나무, 2020, 231쪽.

** 위의 책,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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