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챙겨보는 드라마다. 사실 노희경 작가의 제주도 드라마보다 ('우리들의 블루스'), 이 경기도 드라마를 더 재밌게 보고 있다. 오늘은 11화를 보는데 기정이가 술집에서 하는 대사가 너무 와닿았다. 머리카락. 머리를 밀어 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 심정 안에는 이뻐 보이고 싶은 욕망,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느라 써야 되는 시간들. 긴 머리카락을 감고, 말리고, 이쁘게 드라이하고, 때로는 파마도 하고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좌절도 하고. 말았다가 폈다가.. 많은 시간을 머리카락에 쏟고 산다.
그런 욕망을 다 내려놓고, 편해지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작년 이맘때 남편에게 말했다. '난 퇴사하면, 머리부터 짧게 잘라야겠어'. 항상 남들에 비해 '비교적' 외모에 투자하는 시간이 적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래도 긴 머리가 거추장스럽고, 내가 어딘가에 옭메여 있다는 느낌이 긴 머리를 관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랬는데 남편이 거들었다. '그냥 지금 자르지 그래? 뭘 퇴사하고 나서라고 기다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일종의 세레머니처럼 퇴사 후 하려고 벼르던 중이었는데.. 왠지 그래서 퇴사도 더 못하고 있나 싶기도 했다. (머리 자르기 싫어서?)
그래서 말 나온 김에 자르기로 하고 남편에게 잘라보라고 부탁했다. 뒤로 묶이기만 하면 되니깐 짧게 맘대로 잘라보라 했다. 그땐 긴 머리를 아래로 묶어둔 상태였는데, 이 초보 미용사가 왼손으로 묶인 머리를 잡더니 고무줄 위로 가위질을 시작했다. 그래서 두세 번의 가위질에 내 머리가 잘려나갔다. 어어어~ 하는 사이에 난 한국에서 중학교 다닐 때 빼고 처음으로 초특급으로 짧은 단발머리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 쥐 파먹은 듯한 뒷 머리는 덤이었다. 하하
그렇게 짧아진 머리를 하고 화상채팅으로 보스와 퇴사 인터뷰를 했고, 일 년 넘게 지내다 보니 봐줄 만한 길이가 되었다. 예전 같으면 당장에 동네 미용실에 달려가 '지금보다 이쁘게 다듬어 주세요' 했을 텐데..
난 그냥 버텨 보기로 했다. 머리카락 들쭉날쭉 한 게 뭐가 대수라고. 작년 이맘때 내 머릿속에는 온통 퇴사를 언제 할 것인가, 과연 지금 해도 되는가 등으로 가득 차 이었기에 이상하게 잘린 머리카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남편은 지금쯤 아마....
어쨌든, 막상 이상한 헤어스타일로 살아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다녔기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가끔 머리를 풀어 보여주면 동네 아줌마들이 기겁을 했다. 내 남편이 내 머리를 저렇게 잘라놨다면 살려 두지 않았을 거라고...ㅋㅋ 인스타 친구들은 나더러 용감하다고 했고, 나는 벌칙에 당첨된 것 같다면서 웃어넘겼다.
일 년을 가벼운 머리로 사는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다. 드디어 우리 둘은 월급 없이 사는 법을 터득하고 있고, 보여주기 식 외모 관리는 내려두고 산책과 운동으로 건강을 더 챙기게 되었다. 회사를 안 가니 옷값과 화장품 그리고 미용실에 들어가는 돈도 거의 없다. 무엇보다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이렇게도 살아지는구나를 배우는 중이다.
그래도 며칠 전부터 적당히 길어진 머리카락을 보다 고데기를 집어 들었다. 한두 번 웨이브를 줘 보니 또다시 이뻐 보이고 싶은 욕망이 살짝 올라온다. 머리카락이 맘에 드니 자신감이 더 올라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어쩌다 한 번씩 다시 나를 꾸며 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일 년 정도 지나니 다시 드는 것 같다.
바쁜 사회인으로 살다 회사를 안 가니 느긋하게 도전하고 시험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하루 만에 어떤 결과를 바라지 말고, 생활비도 천천히 줄여 나가고, 소비 욕구도 천천히 줄여나가는 연습을 하고, 투자도 길게 보고 호흡할 수 있는 배짱을 키워 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