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엄마만 모시고 여행 가기로 한 날이 왔다. 아빠는 치매이신 할머니와 집을 지키고, 이번엔 엄마만 우리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일정은 목, 금, 토로 이박 삼일이다. 엄마는 수요일 오후에 경기도 광주에서 세종시로 고속버스를 타고 왔다.
짐은 배낭가방 하나와 손가방 하나로 심플했다.
엄마는 여행을 시작하기 2주 전 갑자기 엉치뼈가 잘 걷지 못할 정도로 아파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매일 맞았다고 했다. 그리고 다행히 이젠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우리의 첫 여행지는 순천이다. 엄마는 순천만국가정원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와의 여행지는 그곳으로 정해졌다.
집에서 떠날 때 만 5살인 둘째를 위해 유모차를 챙겨야 할까 말아야 할까 몇 초 고민했는데 결국 챙겨가지 않았고, 국가정원에 도착해서야 집에 유모차를 두고 온 걸 후회했다. 순천만국가정원은 34만 평의 크기로 어른이 걸어서 모두 구경하기에도 다리 아픈 크기의 정원이고 하루에 모든 곳을 다 둘러보는 건 가능하지 않은 크기였다.
엄마는 스스로 잘 걸어 다닐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막상 떠나오니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힘이 난다고 했다. 다리 아픈 줄도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첫날부터 2만보를 넘게 걷고 나니 다음날부터는 다리가 아파온다고 하기도 했다.
둘째 날 여수에 도착해 오동도에 걸어갔을 땐 다리 아파서 더 이상 계단을 못 내려갈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매정하게 "엄마, 엄마가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잖아? 어서 가자. 할 수 있어!"라며 엄마를 재촉했다. 그렇지 엄마나이 이제 64세인데 벌써부터 다리가 아파 구경을 잘할 수 없다니, 안되지 안 돼.
나는 여행 내내 엄마는 지금 여행 다녀야 한다고, 나중으로 미루면 힘들어서 못 다닌다고, 좀 더 열심히 여행을 다니시라고 말했다. 엄마는 할머니 모시고 아빠와 함께 셋이서 2박 3일이나 1박 2일이라도 좀 더 다녀야겠다고 했다. 할머니 돌아가시면.. 그다음에 다니지 뭐..라고 대답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도 모르거니와 할머니 치매도 초기이니 지금보다 더 나은 때는 조만간 오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고 봐야 한다. 엄마 아빠의 체력도 지금이 가장 좋을 때 일 테고 말이다.
차를 타고 많이 다녀야 하는 여행이다 보니 차 안에서 엄마의 어릴 적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엄마는 시골에 농사짓는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태어났고 형제자매도 엄청 많고 가난했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합창단원으로 뽑혀 운동화를 맞춰 신었어야 했는데 할머니가 사주지 않아 엄청 속상했다고 했다. 그런 엄마를 가엽게 여긴 언니가 그 당시 엄마의 친할머니에게 말해 200원인가 하는 운동화값을 마련해 줬고 엄마는 기쁘고 신나는 마음으로 학교 갈 준비를 했다고 했다. 그날 아침 아궁이 불에 나무를 넣던 중 치마 위에 있던 200원 지폐를 불 속으로 같이 넣어 버리기 전 까진 말이다.. 어떻게 얻은 돈인데 엄마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이 슬펐다고 했다. 엉엉 울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엄마를 마음 약한 할아버지께서 엄마 손을 잡고 같이 가서 운동화를 사주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당시엔 모두가 힘들 때였다면서.. 엄마는 공부하는 게 좋았는데 그땐 가난해서 학교를 잘 다닐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애 다섯을 다 키워놓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대 공부도 마쳤고, 지금은 매주 월요일 심리상담 공부를 하러 서울을 다니고 있다. 2년짜리 프로그램이라던데 배움의 열정이 존경스럽다.
드디어 여행 마지막 날 토요일이다. 순천과 여수를 들러 집으로 오는 길엔 보성 녹차밭에 가보기로 했다. 나와 남편은 16년 전 연애시절 한국에 같이 놀러 왔을 때 여행 간 적이 있다. 어느새 16년 전이라는 게 새삼 놀랍다.
엄마는 보성 녹차밭이 처음이라고 했다. 사진에서 봤을 땐 크기가 어마어마해 보였는데 실제로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여행 첫날부터 많이 걸었기 때문에 녹차밭 정상까진 오르지 못했다. 아이들도 엄마도 차밭 중간쯤에서 이제 고만 내려가자 했다. 정상에 가면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포인트가 있다고 표지판에서 봤는데 난 16년 전에도 그곳까진 올라가지 못했던 것 같고, 이번에도 사진만 열심히 찍고 내려왔다.
여행 마지막 음식으로 녹차떡갈비를 먹고 2박 3일을 마무리했다. 가격도 맛도 최고였다. 여행기간 동안 아무도 다치거나 아프지 않고 여행을 끝마칠 수 있어서 감사한 시간이었다. (아, 우리 둘째가 녹차밭에서 뛰어오다 넘어진 것 빼고,,ㅎㅎ)